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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by 김민규 Dec 03. 2024

나는 안산에 산다. 거주지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친구가 주위에 여럿 있다. 애향심이나 애사심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길게 나누기 어렵다. 공동체 주의가 유난히 강한 사람들은 패거리를 이루어 같이 다닌다.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기댈 수 있는 형이나 대리인을 끌고 와서 대리 싸움을 시키거나 팬덤을 만들어 그 뒤로 숨는다.


단체를 이루는 일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선 서로 알맹이 없는 칭찬이 오간다. 내용 없는 칭찬을 던지며 외로움을 덜어보지만 덜 수 없다. 듣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만 있다. 자신이 준비한 말을 잊지 않으려고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들을 여유가 없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대리인 없이 대화할 수 있고 남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교정해 생산적인 방향으로 뻗어가는 대화가 가능하다. 서로 제한적으로 아는 정보를 재탕해 할 말을 반복하면 대화가 맴돈다. 그러나 가끔은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대화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


나는 나의 출신을 비롯한 온갖 일에 불만을 가지다가 요새는 불만을 가지는 일에도 불만이 생겼다. 우월감을 갖지 않겠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욕심내는 것이다.     


호의적이던 여자 후배에게 나는 사실 경기도에 산다고 고백 공격을 했다. 안색이 흐려지고 답장이 늦어지더니 끝내 읽-씹을 한다. 좁혔다고 생각했던 우리 사이에 예의를 갖춘 정중함이 끼어들어 섭섭하다, 많이. 


고백은 관계의 시작이 아니다. 아직은 서로가 낯설고 신뢰와 애정이 쌓이지 않았는데 고백으로 혼쭐을 내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너무 늦게 깨달았다. 고백 이전에 승패는 이미 결정 나 있다. 마음이 충분히 통하고 나서 서로 사귀는 사이라는 암묵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후에 최종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재 확인 하려는 의도로 고백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생략해도 무방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경기도민의 삶을 모른다. 알면 경기도민인 나에게 광화문이나 강남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진 않을 것이다. 서울 토박이 이거나 서울 토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경기도에도 사람이 사냐고, 그곳은 사막이나 열대우림이 아니냐는 염려로 가린, 가려지지 않는, 미소를 띤다. 염려의 미소인지, 멸시의 미소인지, 멸시보다 더한 감정인데 고작 멸시로만 느낀 건지, 서울에서 살아 보지 못해서 그 심리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노력과 운이 겹쳐서 서울로 거소를 옮긴 경우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서울에서의 삶과 문화적 혜택에 대한 찬미의 강도가 더욱 드세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나서 현격한 질적 차이를 느껴서일까. 자신의 지난한 고생에 대한 연민과 분노가 미약한 차이에 대한 극적 효과를 만드는 것일까.


지방에서 태어나서 서울로 진출했든지, 서울에서 인생을 시작했든지, 아무튼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서울 시민은 경기도로 대피한다. 작전상 후퇴로 잠시 거쳐 가는 지역으로 생각하지만 강남에서 안양으로, 안양에서 안산으로, 안산에서 화성으로 밀리다가 경기도에서의 삶을 감사하며 천당으로 간다. 천당대신 분당을 거쳐 서울로 진출하는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지만 (누구에게? 무엇에게?) 유치원에서 박사과정까지 안산에서 해치우곤 아직도 안산을 못 벗어났다.     


70년대 후반 농촌 공업화 계획으로 설계된 안산은 평평한 지형 위 공단과 주거지를 구분해 길이 격자모양으로 널리 뚫려 있다. 서울 사람들의 풍부한 소비문화를 받들기 위해 밤새 돌아가는 공장에 사지가 결박되어 노동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선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단기간에 조성된 공업도시에는 세월에 기대 쌓인 구조적 복합성이 얇다.  


생리적 한계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는 산업전사들로 뭉쳐진 인공의 도시에는 소화되지 못한 분노와 불안이 옆으로 뒤로 새어 나온다. 위험하고 침울한 이미지로 각종 매체에서 고담안산, 고담성남과 같은 부정적 별칭으로 불린다. 외국인 노동자로 가득한 공업지대에서 낳고 자란 아이들이 한국인 자녀들과 초/중/고를 같이 다니는 다문화 지역이라는 편견과 계층 간, 인종 간 갈등이 빈번해서 베트맨이 범죄자를 소탕할 것만 같은 편견을 갖는 것인데, 편견이 아닌 사실이다. 아직 베트맨을 만나보진 못했다.     


생업을 위해 집을 비운 부모로부터 단절되어 끝이 안 보이는 아파트 숲에 던져진 유년시절은 내 정서의 바닥을 겨우 형성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섞이지 못했고 선생님의 관심을 끌 매력이 없었다. 몸이 약하고 마음은 더 약해서 구석에 숨었다. 학교에 수업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어려웠다. 집에 자주 누워 있었다. 외로움이란 단어를 모르긴 해도 뭔가를 느끼긴 했는데, 아래로 꺼지는 것 같은 기분에 잠겨 시간을 흘렸다. 인생은 별거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눈치챘다.


아파트 너머 세상이 궁금해서 멀리 걸어가 보고 다음날을 더 멀리 걸어가길 반복했다. 아무리 멀리 걸어봐야 아파트 다음에 아파트가 나왔다. 지구는 평평하고 아파트로 가득 차 있었다. 목적지가 필요했다. 초등학교 삼 학년이 되어 버스와 전철을 타고 사는 곳을 벗어나는 일에 흥미를 붙였다. 서울랜드로 한참을 다니다가 더 멀리 가고 싶어서 롯데월드에 갔다. 롯데월드가 질리고 나서는 한동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세상의 끝에는 롯데월드가 있었다. 개장시간에 맞춰 가서 폐장시간까지 놀았다. 이따금 교통편이 끊기면 어머님께서 구하러 왔다. 때가 되면 내가 구하러 가야 한다.


중학생이 되어 명동과 동대문, 이태원에 갔다. 서울에 있는 내가 좋았다. 길거리에 사람들을 염탐하고 비슷한 옷을 사 입고 커피를 마시며 동질감을 느끼려 했다. 사람의 마음속엔 대중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과 대중과는 다른, 격조 높은, 차별성을 갖으려는 욕망이 얽혀있다. 안산에 머무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넓은 세상과 문화에 가 닿아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고 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은, 서울 사람들에 섞인다는 동질감을 느꼈다.


이따금 특이한 사람들을 봐서 먼 길을 다닌 보람이 있었다. 신체의 뒤편에서 아우라가 나오는 듯했다.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세상과의 미학적 조화가 느껴졌다. 욕심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만물의 신호와 섞이려는 태도가 담백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오롯이 갖고 있는 사상이나 감정 따위는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빚지고 있다는 감사함에 잠겨있는 것 같다. 헤리티지에 대한 안목과 이 문화들을 잠시간 유행이 아닌 다음 세대로 넘겨준다는 긍지를 가지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이 알려고 한다. 알수록 자신의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이 안다는 자긍심을 내리고 세상이 내뿜는 신호와 호흡한다. 식자는 지식에 기대고 지자는 기댈 곳 없음에 기댄다.     


서울 사람으로 보였던 사람들 중 다수는 나와 같은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서울은 많은 사람들이 거치며 사용하는 장소다. 소수의 소유자는 저마다 모여 어디 숨어 있는지 만나기가 어렵다. 장벽을 둘러 배타적 공동체를 이루고 우월감에 잠식되어 진리나 신에 보다 가까이 머무는 듯하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지나 지성 혹은 감각의 탓으로 성공의 원인을 돌려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려 한다. 훌륭한 감각이나 두터운 경험에 더해 자본력과 실행력을 겸한 사람이 나르시시스트가 되지 않기는 어렵다.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은 대중으로부터의 인정욕구와 대중을 향한 적의 사이의 갈등을 선민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우월감으로 무장한다. 신경인류학은 혐오를 진화의 과정에서 발달한 필수적인 감정으로 본다.


아파트 담벼락 사이로 부촌과 임대아파트 지역이 나뉘고, 어른들이 자녀들을 공간적으로 격리시켜 부자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임대아파트에 사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나뉘어 있다. 다양한 계층의 어린이들이 다양성을 공유하며 서로 입장을 대면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장이 축소 소멸하고 있다. 학습과정과 자본구축 과정에서 본인이 당한 설움을 대물림하지 않고자 더욱 열정적으로 문화적 장벽을 가르고 자신의 자녀에 대해 보기 민망한 수준의 애정과 소유욕을 품어 발전의지를 심는다. 자기 안에 모순을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알몸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큼 추한 모습이 없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운명에 도시가 감옥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안산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는 나는 가벼운 일탈을 즐긴다. 문명을 아주 등지지는 못해 도시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떠난다. 책임과 욕망을 피해 자연을 찾아 숨었다가 에너지를 채우면 번영과 풍요를 향해 하늘을 찌르듯 치솟는 빌딩숲에 끼어 내달리는 사람들의 대열에 또다시 기웃 거린다.


경복궁에 가서 늘어선 지붕들을 북한산 공제선에 겹쳐보는 일을 좋아한다. 하늘이 설계한 자연에 녹아들기 위해 지붕의 흐름을 산맥에 맞춰서 건물을 올렸다.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한 궁궐 주위로 자본주의에 올라탄 빌딩숲이 밀고 들어와 팽팽한 긴장감을 이룬다. 현재와 과거가 겹치고 산과 건물이 겹치는 도시의 복판에서,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는 맹자의 말 위로 위계 사회를 설계한 사상가들의 의도를 궁궐의 구조너머 더듬는다. 총탄에 파이고 시간에 닳은 흔적을 만지다가 허기가 위장을 더듬어 궁을 떠난다.


종로의 앞길로 다니는 고관대작을 피해 뒤로 숨어 다니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술집과 국밥집, 빈대떡집이 늘어섰다. 현대인들은 피맛골의 낡은 상가 구조물의 흔적을 아주 없애진 못해 일부를 보존하고 그 위로 새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버리진 못하고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이 실현이 가상하다.     


안산에서 서울로 놀러 가려면 반나절 이상의 시간과 정력과 돈을 소비할 각오를 해야 한다. 안산 가까운 곳에 수백 년 적층 된 서울의 냄새를 제법 비슷하게 풍기는 동네가 있다. 수원 구도심 지역이다. 조선의 최초의 신도시인 수원에는 행궁이 감싼 주택가 안으로 얇은 골목이 혈관처럼 뻗어있다. 혈관 미로 속 현대적 편의를 위한 새로운 밥집과 카페, 공방들이 들어섰다. 수백 년 전의 최초 설계 뒤로 편의에 따라 곳곳을 부수고 새로 덮어 지은 구조가 어지러워 재밌다. 흠모하는 사람을 데려가 미로 속으로 숨어 삶의 속도전을 잠시 미루고 감정의 미로를 서로 파서 음성과 눈빛, 웃음과 몸짓에 묻은 온갖 신호를 헤집으며 감정을 비빈다.


복원된 성곽 길을 따라 걷는다. 심장박동에 맞춰 멍하니 걸으면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올라타 잡념이 옅어지고 나를 잊는다. 한참을 걸어 종아리부터 피가 차올라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팽팽히 당긴다. 뒤주에 갇혀 구겨진 사도세자의 사지를 떠 올린다. 그 옆에서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정조가 보인다.


강남에 엄마들이 자식들을 교육하기 위해 극장에 가서 영화 사도를 보여준다고 한다. 부모의 말을 안 듣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인생이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란다. 영조의 의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영조의 교육적 폭력성을 질타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립은 끝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어여삐 여겨 노여움을 풀길 바란다.     


수원화성은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본래 건축물의 실체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의 수원화성은 1970년대 복원팀의 해석에 따라 지금의 모양으로 부분 복원되었고 아직도 복원 중이다. 지금의 화성은 진품일까 가품일까.

썩은 판자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로 교환하기를 거듭하며 수백 년 동안 유지 보수되어 온 배는 예전과 같은 배일까 이전과 다른 배일까. 새 판자를 부착하는 동안 누군가 헌 판자를 모아 다른 배를 만든 경우라면 어느 배가 진품일까. 오랫동안 철학자와 미술가, 보존 복원가들을 괴롭힌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정체성 판단은 어떤 분석적-실질적 목적을 고려한 개인적 판단이라고 말했다. 질료보다는 이전과 똑같은 목적을 구현해 내는 형상과 기능에 초점을 맞춰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형상이 재질에 앞선다면 현재의 복원된 수원화성은 진품이 맞다.


내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내 머리는 다른 사람의 몸에 달리고 내 몸은 다른 사람의 머리에 달린다면 누가 나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나란 있는 걸까. 내가 아닌 오렌지 주스를 마셔서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면 오렌지 주스는 나인가. 방금까지 나와 한 몸이었던 똥이 엉덩이에서 발사돼서 흙과 합체했다. 나였는데 이젠 흙이다. 나는 흙인가.


내 몸의 60조 개의 세포의 평균 수명은 3일인데 일주일 전의 내 몸의 세포는 모두 죽었고 나는 새로운 사람인데 일주일 만에 만난 내 여자 친구는 과연 이전의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가. 있다는 건 뭐고 없다는 건 또 뭘까.

그러니 상대의 기분이 아침과 저녁으로 다르다고 너무 욕하지 말자. 상대는 삼 일 전에 만난 그 사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덮어씌우면, 내 몸은 내가 아니고 영혼이 나다. 영혼은 머리통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몸 밖에 있을까, 화성에 있을까, 평행우주의 건너편에 있을까, 있기나 할까. 마음이 겹겹이 쌓여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마음의 껍데기가 몸은 아닐까.


자아의 규정문제에서 벗어나 화두를 확장하면 모든 경계의 문제에 도달할 수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산이고 땅이며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나만의 고유한 생각 이란 게 있는지, 자유의지는 허구이고 빅뱅에서 시작된 운명론적 신의 계획에 개별자는 연극 중 인건 아닌지, 어차피 서로 모방하고 배우고 흉내 내는 일이라면 지적재산권은 옳은 것일까. 디지털 복제의 시대에 진품과 가품의 경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화폐를 고안하기 전에 인간은 필요에 따라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며 살아왔다. 건네준 나의 물건보다 받은 물건을 더 가치 있다 여기며 부채감을 가졌다. 상대에게 가진 부채감은 관계의 기반이었다. 비교와 획일화는 직책을 만들고 급여를 만들어 숫자로 사람을 평가했다. 풍요를 가져오는 대신 인간을 사물로 격하했다.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사람이 태어나고 죽듯 도시도 운을 다하면 스러진다. 늙은 도시에 활기가 다시 돌아 좋다는 원주민들이 있고 젊은이들이 밀고 들어와 땅값이 올랐다고 혀를 차는 원주민들이 있다. 인간은 세상을 잠시 빌려 쓰고 죽는 것이다. 땅과 공간이 자신의 영원한 점유물인 듯 소유욕에 잠겨 인생을 탕진한다. 누구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내 것이면 어떻고 네 것이면 어떤가. 어쩌면 주인은 사용자 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미학과 건축과 패션은 권력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단장한다. 계층을 나누기 위해 공간을 나누고 구분 짓는다. 경계를 만들고 허무는 투쟁이 반복된다. 거리를 줄이고 벌리기 위한 게임이 반복된다. 중심부-주변부 위계가 세워지고 해체되고 뒤집어지길 반복해 한층 민주적으로 공간이 섞이는 듯 새로운 영토가 생겨나더니 새로운 경계가 세워지고 허물어지길 반복한다.


소유 공간이 없는 사람은 소유권이 불분명한 제3지대에 머문다. 제3지대가 풍부한 지역에서 계층의 이동과 섞임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사람이 서로를 관찰하고 대화를 나눌 여지가 공간을 이룬다. 집이 없는 것인지, 집은 있지만 자녀들의 시선이 불편한 것인지, 행궁동 공원 변에는 수많은 노인들이 그늘에 나와서 시간을 누린다. 죽음을 기다리는 건지 죽음을 피하고 싶은 건지 삼삼오오 모여서 가만히 있거나 혹은 혼자 적막에 잠긴다.


자본주의 양극화의 확장 속에 멀어지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제3 지대가 있다. 내가 자주 방문하는 한 카페의 사장님은 곤란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커피 값을 받지 않는다. 본인이 바쁘든 컨디션인 안 좋든 상관없이 항상 한결같은 차분한 친절과 진정성을 모든 사람에게 전한다. 덕분에 방문하는 손님도, 같이 일하는 동료도 오가는 사람들도 오래 잊고 지내던 인간관계의 맛을 다소 회복한다. 인간을 도구화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일정비율 이상 유지되어야 자본주의가 크게 고장 나지 않고 제 기능을 다할 것이다.


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공간을 구분해 섞임을 차단하는 구조를 경계한다. 참여와 배제를 가르는 기획과 연출내용에 태생적 분노를 느낀다. 자신의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잠식되어 서로를 두려워하는 일에 우울감과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 양극화와 인간 소외의 심화와 사회가 조각나는 일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으로 느껴져 무기력하다. 집중은 배제다. 나와 나의 친구, 나의 중요성에 집중해서 그 주변부를 배제하면 타자를 소외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 자신을 소외시키고 축소시킨다.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미묘하고 복잡한 차이를 배려할 때 인간은 덜 소외된다. 확장하는 획일주의 안에서 느리고 답답한 것들이 오래 버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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