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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괜찮은 시간

괜찮은 시간 (3)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리원은 손목 인대와 턱관절에 손상을 입었다. 인대는 나을 수 있었지만 턱관절은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외관상 문제도 기능에 문제도 없을 테지만, 사고 이후 그녀는 가끔 통증이 느껴지고, 크게 웃기도 힘들어졌다. 활짝 웃을 때면 턱에선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완치는 어렵지만 몇 주간 물리치료를 받으면 관절 사용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씩 물리치료를 다녔다. 그곳에서 아네스 수녀를 처음 만났다. 사고 이후로 편히 잠든 적 없던 리원은 물리치료를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턱을 괄사로 문지르던 손길에 잠시 눈을 떴을 때, 리원은 놀랐다. 아네스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든 사이 누군가 자신을 향해 따스하게 바라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린 리원이 눈을 감는 순간 어른들의 말은 시작됐다. 그들 나름대로는 배려였을 테지만 모든 걸 듣는 아이에겐 고역이었다. 아이는 자고 있지 않았단 걸 들킬까 봐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좁은 벽 사이에 몸이 끼인 듯, 몸을 고정한 채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마치 관에 들어간 듯했다. 


  아이를 누가 키울지, 아이가 앞으로의 생에 얼마나 큰 짐이 될지. 아이를 향한 눈빛의 의미와 흘리듯 쏟아낸 진심, 아이가 몰라서 지나칠 법했던 행동과 어렴풋이 느낀 감정에 대한 해석을 듣는 밤이었다. 자는 척하느라 애쓰는 아이는 오히려 또렷한 집중력으로 어른들의 말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다. 


  사지가 붙들린 채 까마귀에게 심장을 뜯기는 것처럼, 어른들의 말은 아이의 마음에 새겨졌다. 까마귀가 쪼아댄 자리마다 아이의 심장엔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뛸 때마다 심장의 가시가 함께 진동하며 아이의 속을 할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어린 리원은 종일 전날 들은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생각에 잠긴 아이는 잠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을 외부인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면 초등학생의 수업과 요란한 교실과 해맑은 또래들의 미소는 저편의 세계처럼 보였다. 초등학생의 밝은 일상이 리원과 무관하게 여전히 평소와 같은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엄마의 불행은 리원을 제하면 사라진다. 리원은 결론 내렸다. 자신의 자리는 타인의 불행이었다.      


  아네스 수녀의 미소 하나로 리원은 간호대에 진학했다. 간호대를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성적도 적당했고, 다른 꿈도 없었다. 무엇보다 간호사의 일에 희생정신이 필요하다는 것, 꽤 고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지는 모르지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 같았다.     


  요양병원은 유치원 같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서로 말다툼하기도 하고, 같이 음식을 시켜 먹자고 계획을 세우고 놀기도 했다. 누구라도 자식들이 먹을 것을 사 오거나 데리고 외출을 다녀오면 자랑했고, 서로 가지고 있는 간식을 탐내하며 자식들에게 전화해서 똑같은 간식으로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귀자는 그 틈에서 혼자 떨어져,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이 떠들고 싸우고, 자식 자랑을 하고 시샘하는 와중에도 그런 일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는 듯 그 상황을 그저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배경과 멀어질 때의 표정을, 리원은 알고 있었다. 같은 모서리를 지닌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혼자 움켜쥔 아픔이 어떻게 삐져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표정을 귀자에게서 발견했을 때 리원은 차마 다가가지도 외면하지도 못할 감정 속에서 발걸음만 몇 번 주춤했다. 


  마치 손가락 어디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 굳이 빼지 않아도 큰 지장은 없는, 그러나 거슬리고 닿을 때마다 깜짝 놀랄 만큼 따끔거려서 빼버리고 싶기도 한, 막상 빼려고 하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서 포기하고 마는 그런 가시. 무신경하게 움직이는 일상에 갑자기 박혀오는 그런 가시가, 콕 박혀버린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에도 시선과 손길은 계속 가시를 향해 가고야 마는 상황에 놓인 것 같았다.


  리원은 귀자를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환자들처럼 신경 쓰지 않으려고, 그냥 주어진 일만 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티가 났다. 웃으며 인사를 한다던가, 괜히 주사를 놓으면서 손을 한 번 잡는다던가, 대답하는 내내 눈을 계속 맞춘다던가. 그런 소소한 것들을 다른 환자들 역시 금방 눈치채고 있었다.


  “쌤은 이귀자 님만 좋은가 보다.”


  귀자의 옆 침대에 누운 할머니가 뾰로통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리원은 아차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다음부터는 차갑게 구는 것도 이상해질 듯하여 그냥 딱 여기까지만 하자는 심정으로 대했다. 


  리원의 손길은 귀자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온몸에 털이 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몸 어디도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꺼렸다. 어쩔 수 없이 내보이는 얼굴조차 애써 숨기고 싶어 했고, 얼굴에 난 털을 뽑으려 애썼다. 귀자는 이제 손에 난 털도 뽑으려 애썼다. 리원의 손이 닿을 때, 살결과 살결이 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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