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시간 (4)
2023년 10월 11일. 귀자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얼굴 살갗이 다 벗겨져 피가 나고 진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얼굴을 긁었다. 이제는 남들보다 피부가 한 겹은 더 없으면서도 남들보다 한 겹을 더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못살게 굴었다.
벗겨진 가죽은 얕은 바람에도 쓰라리고 잔잔한 가을 햇살에도 타들어 갔다. 한숨 소리에도 비틀거리고 스치는 바람에도 멍드는 리원은 그녀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시로 찾아가 약을 발라줬다.
오후에 귀자의 보호자가 찾아왔다. 속옷과 음식 몇 가지를 챙겨온 보호자는 참 낯선 인상이었다. 보호자는 환자와 어딘가 닮기 마련이다. 함께 살지 않아도 생김새라던가 분위기가 닮았다. 얼굴이 닮지 않더라도 함께 사는 이들은 말투나 사용하는 단어가 닮아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보호자는 영 낯설었다.
막내 조카의 부인이라는 보호자에게 리원은 정신 병원 진료를 권했다. 지금 입원한 병원이 아닌 정신과 전문 병원에서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할 것 같다고 당부했다.
“출출하실 때 드세요.”
쌀이 부담스럽다면 간식이라도 받아달라며 여인이 리원에게 케이크를 건넸다.
“다 같이 나눠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함께 나눠 먹으면 받은 마음이 분산되기라도 하는 듯 리원은 함께라는 말을 힘주어 말했다. 마침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네스 수녀가 병실에 들어왔다. 리원이 아네스에게 인사를 하며 케이크를 먹자고 말했다. 보호자에게 받은 간식이라며 함께 먹자는 리원의 말에 아네스는 알았다고 답했다.
누가 준 것이냐고 묻는 아네스의 물음에 리원은 여인에 대해 말했다.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아네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인은 유독 리원을 좋아했다. 한 날은 아네스가 여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리원을 예뻐하냐고. 여인이 답했다. 마음 쓰는 게 느껴져서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거라고. 그러면서 올봄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져서 혼자 밖에 나가서 울곤 했다. 리원은 그 모습을 못 본 척해 주었다. 쌀쌀한 봄밤에 혼자 울다가 잔기침을 조금 하자, 리원은 보호자가 준 것이라면서 유리병에 담긴 따뜻한 생강차를 여인에게 건넨 적이 있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종종 선물 세트로 포장된 유리병 과일주스를 사 왔다. 그러면 환자들은 그중 몇 병을 간호사실에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생강차는 선물 세트에 들어있던 음료수가 아니었다. 병원 일 층 편의점에서 파는 것이었다. 편의점 로고가 찍힌 생강차는 선물 세트 단위로 팔지 않았고 간호사실에는 음료를 따뜻하게 보관할 온장고도 없었다.
여인은 음료수에 대한 보답으로 뭐라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먹을 것을 몇 번 건네 보았지만, 리원은 전부 거절했다. 오늘에서야 겨우 건넨 것이 케이크였다. 선생님들 드시라고 사 왔다, 자신은 콜레스테롤이 높아서 먹질 못하고 남편은 먹은 밥도 게워 낼 만큼 속이 좋지 않아서 우리는 먹을 수 없다, 케이크는 유통기한도 짧아서 바로 먹어야 한다 등 리원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줄줄 빠르게 읊으면서 케이크를 손에 쥐여 주고 갔다.
여인의 눈에는 리원의 마음 씀씀이가 하나하나 다 보였다. 딱 정해진 일만 하고 가는 듯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다정했다. 환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이 지나가면서 혹은 리원이 병실을 돌 때마다 푸념식으로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 해결해 주었다.
리원과 아네스는 말없이 케이크를 먹었다. 리원은 아네스와 단둘이 있는 게 어색했다. 마음이 불편해서 자세도 괜히 불편하게 섰다. 리원은 아네스가 자신의 예상과 다른 사람일까 봐도, 혹은 너무 좋은 사람일까 봐도 겁났다. 어떤 모습이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네스와 친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각자 이 병원에서 재회하던 날을 회상했다.
리원은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 지원하려고 했었다. 요양병원을 택한 것도 아네스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아네스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리원의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리원이 혼자서 할머니를 뵈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엄마와 함께 병문안을 가서 그냥 시간을 좀 보내다가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날도 그냥 그런 날이었다.
외할머니는 주로 엄마와 대화했다. 리원은 할머니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고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날씨 이야기 같은 소소하고 쓸데없는, 그러나 말을 시작하기 멋쩍을 때 써먹을 법한 그런 주제도 일절 오고 간 적이 없었다.
할머니 앞에 앉아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멍하니 주변을 둘러볼 때, 아네스 수녀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수년 만에 보는 것이었고 고등학생 때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서 인사를 건네긴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해도 되는 것이 인사지만 리원에게는 인사조차 타인의 세계에 들어가는 두드림처럼 느껴져서 섣불리 하지 못했다.
이십 대 간호사가 첫 근무지로 요양병원을 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아네스 수녀가 있는 곳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편안함을 주었던 사람 곁에 있고 싶었다.
리원은 그렇게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입사했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뿌듯하고 대견했다. 이렇게 예쁘게 자라주어 고맙다는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원의 엄마는 리원이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차가운 듯 보여도 서툴 뿐, 누구보다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리원이 근무할 동안 그녀의 할머니도 꽤 오랜 기간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병원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리원이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입이 가벼운 박 간호사 덕에 소문이 퍼졌고, 그 사실만으로 리원의 이미지는 좋아졌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리원을 칭찬했다. 그럴수록 리원은 마음이 무거워졌고 사람들과 친해질 수 없었다.
자신이 할머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알면 그들이 받을 배신감은 어떤 표정일지 벌써 두려워졌다.
리원이 처음 자신을 소개했을 때, 아네스는 바로 알아보았다. 이름도 기억에 남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리원의 버릇이었다. 자신이 지나간 자리를 말끔히 치우던 버릇. 자신의 방식대로가 아닌 원래 있던 자리, 그 모양을 기억해서 그대로 치워 놓는 버릇이었다.
그런 사람은 드물었다. 아네스가 물리 치료실에서 일할 때, 환자들은 거의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었다. 아네스는 환자들에게 물리치료가 끝나면 그냥 그대로 두고 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원은 항상 자신의 자리를 말끔히 치웠다. 말끔히 치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치운 것 같은 깨끗함보다는 누가 봐도 아무도 쓰지 않았던 것 같은 그런 말끔함이었다.
케이크를 먹고 있긴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할 말을 생각하던 리원이 질문을 던졌다.
“기도는... 언제 처음 시작하셨어요?”
질문을 하면서도 본인 스스로 의외라고 느꼈다. 종교가 없기도 했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거나 기도가 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 질문이 나왔을까.
“원수를 사랑할 수 없어서 대신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어요. 내 기도의 시작은 그거였어요.”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란다. 그럴 수 없어서 다른 이들을 사랑해 보려고 했다. 다른 이들에게 연민을 갖고 애정을 갖고 그들을 향한 기도를 매일 쌓았다. 매일 기도를 했을 때, 기도 속에 있는 좋은 말을 가장 먼저 듣고 있는 것은 아네스, 자신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십 년이 흘러 점차 좋아질 수 있었다. 물론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날의 평온은 이제 맛볼 수 없고 기억하기에도 희미해졌지만 아네스에겐 다른 평온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