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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괜찮은 시간

괜찮은 시간 (5)

  귀자가 외부 진료를 받고 돌아왔다. 처방받아 온 약을 살핀 리원은 한숨을 쉬었다. 리원은 귀자의 약 봉투를 보고 화가 났다. 분명 정신과 전문 병원에 가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기껏 다녀온 곳은 정신과 진료도 부수적으로 겸하는 내과 병원이었다. 지금 리원의 병원장도 내과 전문의였다. 


  물론 그 차이를 모를 수도 있다. 내과와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약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 귀자의 경우는 정신증이 심한 상태여서 정신과의 진료를 제대로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는 걸. 그러나 다녀온 병원의 이름을 확인하곤 더욱 화가 났다. 리원의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환자를 데리고 나가서 가까운 곳 아무 곳이나 다녀왔다는 것이 눈에 보여서 한 소리 하고 싶었고, 다시 외출을 보내고 싶었다. 너무 화가 나서 울컥했다.


  그러나 귀자는 그런 보호자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저 다녀와 줘서 고맙다, 일도 바쁠 텐데 나까지 신경 쓰려니 고생이 많다는 말만 했다. 


  그 모습을 본 리원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어물쩍 시간은 갔고, 보호자는 금세 병원 밖을 나갔다. 

  리원에게 현재는 뜨거운 반죽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다가 손을 놓치고 떨어트려서 늘 기괴한 모양으로 굳어버렸다. 기괴하게 굳은 것들이 리원의 속을 채웠다. 


  지나치고 무시하는 상황이 매번 불편하면서도 어디까지 타인의 삶에 개입해야 하는지는 늘 어려웠다. 자신이 들어간 자리가 타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가 두려웠고, 방관하는 것도 거북했다. 리원은 매번 다른 상황을 통해, 같은 이유로 자신을 혐오했다. 


  퇴근길에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봤다. 아네스 수녀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네스는 답답할 때 하늘을 본다고 했다. 딴 세상인 듯 보이는 하늘을 보고 나면, 현재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빠르게 걸었다. 건물 사이로 열심히 걸어 봐도 스쳐 가는 건 건물뿐 리원이 바라보는 하늘은 끝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어디서고 그녀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한, 하늘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달아나도 시간이 흘러도 이전과 다른 풍경을 눈에 넣어도 결국 바뀌지 않는 하늘 아래 있었다.      


  리원이 달린다. 어딘가를 향해 계속 뛰어간다.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젖어 든다. 손금 사이로 땀이 고인다. 닦아내고 닦아내도 물기는 닦이지 않는다. 길가의 나무에, 벽에, 간판에. 보이는 대로 손에 묻은 땀을 닦아보지만 물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리원이 쥐는 모든 것에 물이 묻는다. 그 물이 점점 젖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세상을 덮는다. 물에 젖은 세상이 이전보다 짙은 색을 띤다. 구름이 무겁게 내린다. 이어서 폭우가 쏟아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멈춰 서서 짙어진 하늘을 본다. 시선이 리원에게로 옮겨간다. 세상의 모두가 그녀를 본다. 그녀를 향해 돌아선 사람 중에는 교통사고로 피를 흘리는 고등학생과 엄마가 있다. 남학생의 피와 하늘의 비가 만나 땅에 고인다. 땅이 순식간에 피로 가득 찬다. 바닥에 흐르는 피가 신발을 타고 그녀의 바지로, 옷으로 몸으로 이내 얼굴로 스민다. 몸속에 스민 피에 그녀의 숨이 점점 막혀온다. 그러자 비가 그친다. 이제 비는 오로지 그녀의 몸속에만 존재한다. 하늘이 개고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한다. 화창한 낮에, 리원은 홀로 서서 익사한다.      


  악몽에서 깬 리원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깨어나면 어딘가 개운해졌다. 울고 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엔 왠지 주변과 어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리원은 초록색 옷을 꺼내 입었다. 


  어디서든 초록은 어울렸다. 건물 사이에 늘 나무가 있는 것처럼, 딱 그 정도만이라도 세상에 어울리고 싶었다. 삶이 여전히 낯설면서도 리원은 아직도 세상에 어울리고 싶었다. 


  출근한 리원이 병실에 들어섰다. 어린 환자가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아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아이가 자는 척하지 않길 바랐다. 


  어른은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어른의 세계에 있는 배경처럼 대한다. 자는 아이는 더욱 그랬다. 자는 동안 크지 않았던 날도 있지만 자는 척하는 동안은 컸다. 자는 척하는 밤마다 어른의 세계를 배워갔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세상을 알았고, 어른의 말이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세상을 몰랐다.


 “자고 있으니까 주사 아프게 놔야겠다.”


  리원의 말에 아이가 놀라서 눈을 떴다. 저번에 한 번 주삿바늘을 피하려고 갑자기 발버둥 치는 바람에 혈관이 터진 적이 있었다. 


  피는 경계를 벗어날 때 등장한다. 갑자기 사고가 나거나 뜻하지 않게 태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 앞에는 붉은 피가 길을 연다. 


  “자는 척하지 마요.”


  리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따라 짓궂게 웃어 보였다. 


  귀자의 상태는 점차 더 심해졌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더 이상 약도 잘 들지 않았다. 초반에는 수면제를 먹으면 잠에 들었지만 이제는 수면제에도 내성이 생길 대로 생겨서 어떤 약도 잘 들지 않았고, 과하게 처방하다가는 심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어서 처방도 마음대로 내릴 수 없었다. 


  귀자는 점차 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털이 갈수록 많이 자라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매일 밤 털을 뽑으려 애썼다. 손톱을 깎아주는 이가 없어 손톱은 길게 자라났고, 그런 손톱으로 얼굴에 난 털을 뽑으려 하니 얼굴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리원은 귀자의 손톱을 깎아주었고 매일 약을 발라주었다. 요오드로 소독하고 항생제 연고를 발라주었지만 상처는 아물 새가 없었다. 매일 계속되는 그녀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그녀 눈에만 보이는 털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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