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시간 (6)
2023년 10월 14일. 귀자가 면회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자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기 싫다며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이제 그녀의 눈에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그녀를 거의 포기했다. 의사도 습관처럼 안정제와 항생제를 처방할 뿐이었다. 그러나 약은 그녀를 따라오지 못했다.
늘 그녀가 빨랐다. 안정제가 몸에 퍼지는 시간보다 그녀의 불안과 혐오가 더 빨랐고, 연고가 효과를 발휘하는 시간보다 얼굴에 상처를 내는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중 그녀보다 빠른 것은 없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귀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리원은 귀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리원의 삶은 늘 무언가에 휩쓸렸다. 그리고 그 힘은 늘 그녀에게서 시작되었다. 리원 스스로도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여러 번 말해왔다. 그러나 그 말은 먹히지 않았다. 자신만 알고 있는 만약의 가능성이 리원을 괴롭게 만들었다. 만약이라는 단어 뒤에 올 문장은 본인만 알고 있다. 삶에서 일어날 다른 가능성을 혼자서 열어보며 계속 그 시간에 머무는 것은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말릴 수 없게 확고한 그녀의 환상만큼, 딱 그만큼 귀자는 외롭다는 것이었다. 세상과 멀어진 만큼, 사람들과 멀어진 만큼 그녀는 세상에 어울리고 싶었다.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귀자의 인생은 모질게도 늘 바라는 대로가 아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가곤 했다.
리원은 귀자가 안타까웠다. 어떻게 없는 것이 그리도 생생히 느껴지는 걸까. 항상 몸에 붙어 있는 걸까. 환각이 그렇게 지속해서 오래 몸에 달라붙을 수도 있는 것인가.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모든 기준은 자신이라는 글.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시나 상황, 서사도 없이 그저 괜찮다는 응원만으로 한 권을 가득 채운 에세이.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샀더니 돈을 날린 기분이었다. 무작정 응원하는 것만큼 허황한 것이 있을까.
그리고 또 다른 책들이 떠올랐다. 죄책감에 관한 책, 자의식, 우울, 불안, 트라우마에 관한 책. 꽤 많은 책을 읽어왔다. 작정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래 책을 좋아했다. 그런데 책을 여러 권 구매할 때면 꼭 그런 종류의 책이 한 권씩은 섞여 있었다.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때면, 광고가 뜰 때면 늘 구매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책에 이끌렸다.
누구보다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가 읽은 숱한 책들은 그녀에게 와 닿지 못했다. 기름 막을 발라놓고 비를 흩뿌리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 흡수되지 못하고 그저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기만 했다.
그랬던 책들이 이 순간 한꺼번에 그녀의 머릿속에 흩어졌다. 마른 땅에 비가 내려, 내리기 무섭게 스며들 듯, 갑자기 겉돌기만 했던 그 많은 문장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시작해서 온몸 구석구석 닿는 것 같았다. 그저 글자이고 문장일 뿐이어서 그림처럼 느껴지던 말들이 촉감을 지닌 물체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틈입하던 기억의 괴로움, 그때마다 동맥을 꼬집던 습관, 외할머니를 미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느낀 사고, 이 모든 감정을 숨기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증스러운 자신에 대한 원망, 칭찬을 받을 때마다 도리어 송구스러워지는 더러운 기분들, 자신이 소름 끼칠 때마다 몸속 장기 구석구석까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모든 장기를 빼내어 긁어버리고 싶었던 그 몸부림. 끊임없이 리원을 덮치는 모든 것들이 귀자의 털과 닮아있었다.
괜찮다, 얼굴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진짜지만 믿기 힘들었다. 그럴 땐 믿기 쉬운 가짜가 나았다. 이거 먹으면 낫는대요. 여기 보세요. 이쪽은 조금 나아졌어요. 매일 리원의 거짓말이 시작됐다.
“여기 털을 떼 드릴게요.”
그녀는 이전과 다른 항생제 연고를 들고 왔다. 이 연고는 털을 녹이는 연고라고 말했다. 강력한 거니까 눈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일부러 신신당부하며 주의를 줬다. 그 말에 귀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전에 개발된 거래요. 갈수록 좋은 약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 말이 좋은 세상이니 조금 더 살아보자는 말이란 걸 귀자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귀자에게 닿을 수 있는 말일까. 닿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