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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괜찮은 시간

괜찮은 시간 (2)

 “아휴 저분은 또 저러시네. 저 집 아들도 참 대단하다.”


  퇴근 준비를 하려던 박 간호사가 건너편 침상을 보며 속삭였다. 환자가 보호자에게 간식을 사 오라고 당부 중이었다. 매일 전화해서 보호자에게 심부름시키는 환자여서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환자였다. 보호자로선 죽을 노릇이지만 환자도 어쩔 수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외부와는 더욱 단절되었다. 규제가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요양병원은 환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고, 면회도 금지되어 있다. 그럴수록 환자들은 보호자를 더 자주 찾았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정말 보호자뿐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과 코로나를 핑계로 병문안을 안 가도 돼서 좋아하는 보호자를 둔 환자들 사이에서, 보호자가 잘 챙겨주는 환자는 유독 어깨가 올라갔고, 유세를 부렸다.


  “꼭 사 와라, 모카빵이야. 알았지? 사거리의 그 빵집에서 사 와.”


  빵을 사 오라고 시키는 환자의 목소리에 리원의 심장이 따가워졌다. 누군가 가시로 찌른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통증은 늘 기억과 함께 찾아온다. 기억은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지금 리원의 머릿속은 고등학생 때의 기억으로 뒤덮였다.      


  “오는 길에 빵 좀 사 와, 알았지?”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빵을 사 오라던 엄마의 전화에 고등학생인 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원은 외할머니가 불편했다. 할머니의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할머니의 눈은 리원이 엄마의 생을 짓누르는 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빵집은 리원의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다. 빵을 사려면 셔틀버스에서 늘 내리던 곳이 아닌, 그 전의 정류장에서 내려야 했다. 왠지 심부름하기가 싫어진 그녀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학교 셔틀버스가 리원의 집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빠르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순간 몸이 붕 뜨면서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투명해서 존재감이 없던 창은 순식간에 불투명한 빛을 뿜으며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건너편에 쓰러진 남학생이 보였다. 매일 같은 버스를 타서 인사를 나누던 학생이었다. 머리에서 뿜어진 그의 피가 흘러, 리원의 운동화에 닿았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구급차가 오고 리원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CT와 MRI 등 여러 검사를 거쳤다. 리원은 한 달 넘게 깁스하면서 꾸준히 통원 치료를 다녀야 했다. 다른 친구들도 리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남학생이었다. 


  리원이 지켜본 그 모습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교실 책상엔 흰 국화가 며칠간 놓여있었다. 


  그 남학생이 모범생이었다, 효자였다, 재능도 많았다, 부모가 실성했다더라, 쓰러졌다더라, 버스 운전기사가 해고되었다더라, 학교에서 오랜 기간 여러 차례 회의가 있었다더라, 뉴스에 나왔다더라, 사립이라 기사가 빠르게 내려갔다더라 등등. 


  사건을 두고 오가는 말이 많았으나 리원의 머릿속을 울리는 말은 단 한 명, 리원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내가 그날 빵을 사러 내렸더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고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 순간을 피하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건 그들 중 누구도 사고를 비껴가지 않아서이다. 아무도 행동하지 않아서이다. 행운만큼이나 불행도 무수한 우연이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결코 쉽게, 별거 아닌 걸로 사람이 불행해질 수는 없다. 그렇게 거대한 실타래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엮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불행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면, 그 무수히 엮인 우연의 마지막 퍼즐은 바로 나이다.     


  리원은 손목 안쪽을 세게 꼬집었다. 수시로 떠오르는 잔상에서 빠르게 빠져나오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매번 다른 위치를 더 강한 강도로 꼬집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병실을 돌아 나오는데 멀리서 아네스 수녀가 다가왔다. 50대 중반에 푸근한 인상을 가진 아네스는 늘 해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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