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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괜찮은 시간

괜찮은 시간 (1)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부정문이다. 완곡한 거절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온다. 


  “정말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리원은 60대 중반의 여성을 향해 정중히 거절하고 돌아섰다. 여인은 남편의 담당 간호사인 리원에게 줄 쇼핑백을 건네지 못한 채 서 있다. 유일한 가족인 남편이 입원하게 되어 집에 쌀이 남는다며, 혼자 사는 리원에게 쌀을 갖다 준 것이었다. 여인은 이렇게 쌀을 나눠 먹는 사람이 리원 말고도 한 명 더 있다고 말했다. 어차피 남는 쌀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달라고 덧붙였다.


  여인의 외아들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 남편까지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보호자가 된 그녀는 매일 부지런히, 바삐 움직일수록 혼자만 멀쩡한 몸을 가지고 사는 게 어딘가 죄스러웠다. 혼자 남게 될 것 같은 헛헛한 마음에, 원래 가족의 수대로 쌀을 나눠 먹을 식구라도 세 명 구한 것이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리원은 더욱 단호하게 거절했다. 


  가장 예쁠 때, 가장 빠르게 세상을 떠난 아들이 생각나 꽃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없던 여인이다. 리원은 꽃이 만발해서 더욱 서러운 봄과, 목 놓아 울던 여인의 여름을 알고도 모른척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식구를 만들어서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 애쓰는 가을도 무시하면 된다. 그렇게 되뇌며 바쁘게 걸어갔다.


  출근하자마자 보호자와 이야기하느라 근무가 조금 늦어졌다. 빠르게 복도를 지르는 리원의 걸음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향했다. 아직은 살아있으나 곧 죽음으로 향할 어딘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새로운 환자와 임종이 다가온 환자가 번갈아 가며 스쳤다. 


  그 공간을 초연하게 걷는 리원은 병원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이십 대의 간호사다. 옆머리 한 올 없이 잘 말아 넣은 머리칼과 흰 피부, 마른 몸은 삶의 어떤 군더더기도 원치 않은 그녀의 마음을 몸으로 드러내는 듯했다. 쥐고 있는 삶보다 다가올 죽음이 더 가까운 공간을 걷고 있는 그녀는 어쩌면 그곳에서 가장 삶과 먼 인물일지도 모른다.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박 간호사가 리원에게 환자 인수인계를 했다.


  “이귀자 님. 오전에 들어온 신규 환자인데…” 


  2023년 10월 5일.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이귀자. 82세. 여성. 당뇨 합병증과 환각 증세. 


  그녀의 가장 심각한 증세는 환각이었다. 온몸에, 특히 얼굴에 털이 가득 나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매일 거울을 보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털을 손으로 마구 뜯어냈다. 자신을 향한 혐오가 가득 차면 결국은 자신의 감각까지 파고드는 것일까. 그 감각이 만들어 낸 거짓을 진심으로 믿게 되는 걸까. 


  특별한 과거력은 없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특이 사항이라면 가족이 없다는 것. 그러나 리원이 근무하는 병원은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도 더러 있어서 그리 유별난 사항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원은 알고 있다. 평범하고 별거 없어 보이지만 홀로 아파하고 견뎌내는 날들의 이야기를. 


  “리원쌤, 이젠 하다 하다 정신과 환자까지 받나 봐요. 어휴, 우리만 죽어나지.”


  인수인계를 마친 박 간호사가 리원에게 말했다. 요즘 병원이 어수선했다. 병원장의 건물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병원장은 병원을 팔기로 했고, 병원의 물품들을 아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허술해진 것은 직원들의 간식이었다. 그리고 가운, 환자복 순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아끼기 시작했다. 이제 곧 팔아버릴 병원에 더 이상 그 어떤 투자도 하지 않겠다는 심보였다. 


  그렇다고 병원 일이 한가해진 것은 아니었다. 간호부장은 병원 설립 이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장은 지금 병원의 시스템, 물품, 환자, 직원들까지 모두 승계하는 조건으로 인수자를 알아봤고 구두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따라서 환자 수를 최대한 많이 끌어와, 병실을 가득 채워야 비싼 값에 병원을 넘길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이’라는 말은 오로지 숫자만을 염두에 둔 문장이었다. 그래서 본래 전공 진료과목이 아닌 환자들도 상관없이 마구 들이는 중이었다. 일단 들이고 다른 전문 병원의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외래 진료를 보내는 식으로 진료를 진행했다. 어떤 형태로든 환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사람 중 하나가 귀자였다. 그녀는 정신 병동에 있어야 할 환자임에도 전공 진료과목이 내과인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가까운 보호자가 없는 환자의 경우 서류상 보호자의 편의대로 적당한 병원에 입원시키곤 했다. 리원의 간호부장은 몇 가지 편의를 봐주고, 입원 가격을 조금 할인해 주는 조건으로 귀자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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