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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May 15. 2021

지렁이 장례식

7살 뀨에게도 단독주택  생활 1년이 쌓였다.

비가 잦은 봄이라 그런지 시멘트 바닥에 지렁이가 자주 눈에 띈다. 유치원 등하원 길, 눈에 띄는 지렁이들을 열심히 흙으로 옮겨줬다. 정확히는... 7살 뀨가 열심히 옮기고 나는 그런 뀨를 열렬히 응원해줬다. 지렁이가 얼마나 유익한 동물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렁이한테는 당최 적응이 안 되는... 그런 징그러움이 있다. 뀨도 처음에는 징그럽다며 나뭇가지를 찾아와 지렁이를 살짝 걸쳐서 옮기더니 요즘에는 그냥 맨 손으로 잡아 옮긴다.

지렁이 구출 작전을 벌인 날이면 뀨는 무척 뿌듯해했다.

'지렁이가 건강하게 잘 살겠지?'라며 뀨가 씨익 웃는다.

그럼 나는 '응응~ 뀨 덕에 지렁이는 건강해지고 그 덕에 땅도 더 건강해질 거야~'라며 뀨의 지렁이 구출을 부추긴다.


며칠 전 현관 앞 나무 데크에 지렁이 사체(!)가 놓여 있었다. 유치원을 가려던 인규가 쭈그리고 앉아 지렁이를 지켜본다. 빗물을 따라 신나게 산책 나왔을 지렁이 한 마리가 생을 마감한 현장에서... 뀨는 지렁이를 집어 조심스레 바로 옆 화단에 옮겨줬다. '아, 이미 사후강직이'라고는- 차마 말 못 하고. 늘 그랬듯 잘했다며 물개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고는 뀨가 없을 때 딴 곳으로 옮겨야지 했는데,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뀨가 자신이 놨던 곳에 그대로 있는 지렁이를 발견해버렸다. '아이고 치워놓을걸 어쩌지'하고 있는데, 뀨가 먼저 말한다.


'엄마 지렁이 죽었나 봐. 우리 지렁이 묻어줄까'.


삽을 챙겨 와 흙을 파고, 지렁이를 넣고 다시 흙으로 덮어줬다. 묻어주자고 한 마음이 이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뭘 하려는지 부지런히 마당을 오간다. 뀨는 그렇게 하얀 철쭉꽃을 따오고 예쁜 돌멩이를 가져와 지렁이를 묻은 곳을 꾸며줬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해준 게 참 고마웠다.      


뀨의 지렁이 장례식. 왜 꽃과 돌멩이를 놔줬냐 물었더니 '그냥. 지렁이가 불쌍해서.' 라고 했다.


올해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을 때 보니 뀨 손이 제법 야무져졌다. 모종판에서 토마토를 꺼내고 흙에 옮겨 심는 과정을 혼자 잘 해낸다. 뀨 손에도 경험이 쌓여있다. 뿌리가 잘 내리도록 땅을 꾹꾹 눌러줘야 한다 했더니 자그마한 두 손으로 꾹꾹 제대로 흙을 누른다. 물 주는 것도 모종에 부담이 안 가도록 조심스레 주는 게, 한 해 동안 참 많이 컸다 싶다.



지난 1년. 뀨는 수시로 흙을 밟고 자랐다. 뀨는 자주 땅을 파 마당에 진흙 웅덩이를 만든다. 어떨 때는 고양이 함정이고 어떨 때는 요리고 어떤 때는 티라노사우르스 목욕탕이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마당에서 비눗방울 놀이만 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놀이가 더 다양해졌다. 이번 봄에는 잡초를 뽑으며 놀았다. 꽃가게 사장님이라며 잡초를 강매(!) 하기도 하고 행운의 잡초를 찾았다며 방방 뛰기도 하고 영웅이 되는 잡초를 발견했다며 뽑은 잡초를 다시 심기도(!!) 한다. 마당에 잔디를 심어볼까 했지만 뀨 놀이를 보고 일찌감치 접기로 했다. 근사하지 않더라도 뀨 나름의 방식으로 마당을 즐겁게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옷에 흙이 묻..... 아냐. 너가 즐거우면 됐어.


이사 온 직후 장난스레 망고씨를 심어봤던 마당 한편에 유치원에서 싹을 틔워 온 봉선화를 심었다. 벚꽃이 만개했던 지난 4월 현관문을 열 때면 분홍 꽃잎이 파르르 원을 그리며 돌았다. 집 곳곳에 뀨와 나눈 추억이 쌓였다. 동네 유치원으로 옮기면서 이제 골목마다 추억이 쌓여간다. 올봄 동네 민들레 씨는 다 불고 다녔으니 내년이면 규 입김에 데워진 민들레들이 골목 곳곳에 피어날 것이다.


지난 1년, 뀨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독주택 살아보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뀨는 이사 와서 뭐가 제일 좋아?' 물었더니 '맘껏 뛰는 거'라고 답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 1년. 뛰지 마 소리를 안 했다. 그거 하나로도 뭐.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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