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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Jun 10. 2021

주택살이 2년 차, 버찌를 발견하다.

계절 한 바퀴를 돌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벚꽃이 한바탕 쏟아붓고 지나간 골목에 까맣고 빨간 열매가 떨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꽃 폈던 곳마다 열매가 가득하다. 음.... 뭐지? 벚꽃에 웬 열매지?


엄마한테 물어보니 그게 바로 '버찌'라 하신다. 버찌로 술도 담가 먹는다고. 버찌란 말은 들어봤던 거 같은데 그게 벚꽃 열매였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꽃이란 게 열매를 맺기 위한 생존 전략인데. 그런데도 벚꽃 아름다운 것만 눈에 들어왔지 그다음은 잘 몰랐다.


그렇게 한 번 눈에 들어오니 골목마다 버찌 천지다. 예쁜 벚꽃잎을 주웠던 곳에서 고운 버찌 열매를 주웠다. 앵두보다 작은 게 반짝, 탱글. 이쁘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참새가 많이 보인다 싶었는데, 참새가 바쁘게 오가며 버찌를 쪼아 먹는다. 살펴보니 우리 집 마당에도 버찌가 여기저기 떨어져 흔적을 남겨놨다. 잉크방울이 번진듯한 자국이 버찌가 남긴 거였다.



아니, 근데... 나는 왜 버찌를 이제야 본 거지?


지난해 이 계절에도 나는 분명 이곳에 있었다. 벚꽃이 다 떨어졌을 때쯤 이사를 들어왔으니 작년에도 꽃자리마다 버찌가 맺혔을 텐데. 그렇다면 작은 참새들이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열매를 먹었을 텐데. 마당 곳곳에 잉크방울이 번진 듯 버찌 열매가 터진 흔적이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걸까.


사람을 만나듯 집도 한 계절은 돌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사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마당에 웬 커다란 꽃이 피어났다. 달 마냥 휘영청 핀 붉은 꽃. 엄마가 '목단'이라고 알려주셨다. 마당에 놓인 돌절구나 툇마루같이 집주인의 고풍스러운 취향에 딱 어울리는 꽃이었다. 씨앗까지 떨구고 나자 영 힘을 못 쓰고 죽어가길래 가지를 싹둑 잘라냈다. 사실 화려하고 큰 꽃보다는 작고 앙증맞은 들꽃을 더 좋아하는 편인지라 시큰둥하기도 했다. 그런데 계절을 돌아 다시 봄이 되니 원래 목단이 있던 땅에서 '쑥쑥' 새로운 가지가 솟아올랐다. 어찌나 잘 크는지 한두 달 만에 원래 키만큼, 표현 그대로 '쑥쑥' 커 다시 주먹만 한 꽃망울이 맺혔다. 잘 살펴보니 잘라낸 곳은 그대로 있고 그 옆에서 다른 가지들이 솟아난 거였다. 작년에 본 목단과 같은 뿌리 같은 꽃인데 어찌나 이쁜지. 내가 애써 키워낸 것 마냥 달라 보였다.   


'어머님 카톡 프사용' 같은 이 꽃이 목단이다. 보통 활짝핀 꽃이 이쁘기 마련인데 목단은 피기 전 아기 주먹처럼 맺힌 봉우리가 참 멋지다.


제법 여유가 생긴 부분도 있다. '우웅' 하고 날아드는가 싶더니 창문에 '툭, 툭' 부딪히는 소리. '풍뎅이 어쩌고 군단'이다. 지난해 딱 이맘때쯤 자꾸 뭔가가 창문에 부딪히길래 나가봤더니 검지 손톱정도 되는 곤충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6월이면 날아와 자꾸 창문에 부딪히는 이 친구. 이름 아시는 분?


대체 이것들은 뭔가 싶어 비슷한 애들로 검색했다가 권연 벌레로 착각하고 혼자 식겁했다. (권연 벌레는 훨씬 작은 애들이었다;;) 온 집이 이 벌레에게 침공당하는구나 싶어서 '권연 벌레 원인, 권연 벌레 없애기, 벌레 없애기' 등등을 검색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풍뎅이 어쩌고 군단'은 일주일도 안 돼 언제 왔냐는 듯 모두 사라졌다. 끝내 정확한 이름도 알아내지 못해 나 혼자 풍뎅이과 곤충으로 결론짓고 말았다. 그리고는 딱 1년이 지나자 다시 '툭, 툭'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 느꼈던 공포감과 달리 올해는 피식 웃음부터 났다. '요것들 또 왔구나' 싶어서.


다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지난겨울 꽉 막힌 주방 하수도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날이 따뜻해지니 다시 물이 잘 내려갔다. 집주인에게 연락해 땅을 파는 나름 대형 공사를 하네, 마네 고민이었는데. 겨울 한철 땅이 얼어 그런 거라면 그냥 조용히 살까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또 물이 차오른다. 땅이 얼고 녹는 계절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소리 소문 없이 오래 살고 싶은 세입자 마음에 살짝 한숨이 나온다. 역시 지난겨울 안방보다 2도가량 낮아 난방 텐트를 설치해야 했던 뀨 방은 한여름이 가까워 올수록 빛을 발한다. 조금 더 시원하고 조금 더 쾌적하다. 겨울을 돌아 여름을 맞이한 덕에 알게 된 점이다.


여름. 두 번째 여름이 왔다. 올해는 마당에 제대로 된 수영장을 설치하기로 했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와 징글징글한 모기 기억이 먼저 나는 지난해 여름보다, 더 야무지게 보내야지. 점차 짙어져 가는 여름만큼, 붉은기가 돌기 시작한 2층 베란다 방울토마토만큼- 주택 생활도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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