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수능공부 대신 소논문을 씁니다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둘째 아이는 한때 MBTI 신봉자였습니다. 재미 삼아 자신의 성격 유형을 한두 번 정도 가늠해 보던 것이 어느 순간 단순한 재미의 수준을 넘어서 가족은 물론 친구들과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지인들의 MBTI까지 다 기억하고 분석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MBTI에 대한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MBTI라는 것을 모르던 아주 어릴 때부터 둘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행동 패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낯설어 하기보다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했고 처음 만나는 또래에게도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는 일이 자연스러운 아이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심리 그리고 신변잡기 전반에 관심을 가진 아이에게 MBTI는 자신과 타인을 규정하고 알아가기에 더없이 매력적이고 좋은 도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틈만나면 MBTI 검사를 하자고 해서 나온 결과를 분석해주고 엄마와 자기가 왜 다른지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저로서는 MBTI가 혈액형 유형으로 성격을 가늠해보거나 별자리나 타로점을 가지고 사람들의 성격과 운세를 예측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기 때문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여러 번 딸아이가 MBTI 검사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글자가 I(내향성) 라는 것 말고는 아직도 저의 성격유형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관심밖의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MBTI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성격 유형을 거의 정확하게 분석해주었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올해 12학년이 된 연초부터 소논문 주제를 정하고 일년간 연구논문을 씁니다. 작년 11학년 한해 동안 학교에서 ‘학술적 글쓰기’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소논문을 쓰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웠고 실제로 소논문을 쓰고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올해는 작년에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해서 본격적인 졸업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제는 예상했던 대로 MBTI 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쓰고 있는 논문의 내용을 조금 들여다보니 의외의 부분이 보였습니다.
MBTI 신봉자의 입장이 아닌 MBTI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주는 영향과 개선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비판하고 해결책을 찾아나가려는 것이 연구논문의 목적이자 주요 내용입니다. 사실 작년에 아이가 MBTI 신봉자 입장에서 비판자의 입장으로 전환되기까지는 작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휴 잭맨’ 주연의 영화 <위대한 쇼맨> 입니다. OST가 기가막히게 훌륭한데다가 특별히 ‘휴 잭맨’의 찐팬인 큰 아이 때문에 가족 모두 도합 수십 번은 영화를 반복해서 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한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보니 저와 아이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 ‘바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넘’은 쇼비즈니스 창시자로 무대 공연으로 전세계를 매료시킨 실존인물입니다. 바넘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둔 엔터네이너 였는지 그가 무대 위에서 사람의 성격유형을 맞추며 보여준 퍼포먼스는 당시 미국사회에 대단한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였습니다. 바넘의 성공 이후로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소위 ‘콜드리딩’이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는 기술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때 생겨난 용어가 바로 ‘바넘효과’입니다. 바넘효과란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성격 특성을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믿으려는 현상입니다. 바넘효과의 실험을 위해 한무리의 연구원들이 학생들에게 동일한 성격 검사지를 나누어주었는데 놀랍게도 80% 이상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격을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답했습니다. 이러한 실험결과를 통해 ‘바넘효과’라는 것은 결국 애매모호한 일반적인 진술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쇼맨>이라는 영화를 통해 주인공 바넘의 삶과 ‘바넘효과’라는 것을 알게 된 딸아이는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MBTI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신봉하고 있던 것이 사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약간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MBTI가 실제로는 ‘바넘효과’를 대표하는 분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때부터 논문 주제를 구체적으로 잡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는 연구의 주제와 목적에 대해 여러 차례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습니다. 올해도 작년에 이어 듣고 있는 수업인 ‘학술적 글쓰기’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도 하고 수정도 여러차례 받았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고등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지를 작성하기 위해 질문지를 만들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논문의 첫머리를 구상 중인데도 꼬박 두 달 이상이 걸렸습니다. 자신이 찾은 참고도서와 제가 건내준 몇 권의 책들을 들춰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MBTI에 관한 정보와 전문가들의 칼럼을 정독하기도 합니다.
주말에도 논문 연구로 머리속이 쉴틈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아이가 MBTI를 접하고나서 너무 MBTI에 몰입할 때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고도 싶었습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그것이 그렇게 신봉할 것은 아니라고 저 나름의 빈약한 논리로 강요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 그렇게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요즘에 듭니다. 평소 때처럼 제 생각을 아이에게 주입하려고 했다면 아이는 지금처럼 MBTI에 대한 지식도 없었을 테고 MBTI에 빠져 지내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MBTI 의 문제점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졸업 논문의 주제가 될 거라고는 아이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엄마의 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에 아이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 같았지만 그런 세세한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자신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MBTI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제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적이 정말 많았습니다. 어른의 눈으로 볼때 이게 아닌데 싶은 것들이 있더라도 충분히 경험해보고 실수도 하도록 기다려주기보다는 그 길이 아니라고 방향을 틀어주려고 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이 좋아하고 관심있는 분야에 나름의 고집을 지켜준 점입니다. 둘째 아이가 11학년이 되던 해에 수능 공부를 할 것인지 논문을 쓰고 대안학교를 졸업할 것인지 고민할 때에도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이는 고민끝에 논문을 쓰기로 결정했고 대안학교의 마지막 학년의 모든 교과과정을 충실히 따라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책도 읽고 설문 조사도 하면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런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의 질이나 수준이 어떠한지를 떠나서 아이가 자신이 정말 관심을 가져온 분야를 토대로 연구할 수 있는 학습환경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이는 주말에도 쉴새 없이 어려운 논문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을 뒤져야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이 아이에게 엄청난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