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신성한 자녀 양육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by 리니아니


미국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고 유능하며 실력 있는 국무부장관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1965년 미합중국의 제6대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또한 미국의 제2대 대통령 J. 애덤스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존 퀸시가 아버를 따라 장기간 해외에 나가있어야 했을 때 어머니 아비가일은 아들의 앞길에 만만치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영영 아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이별이 모자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맏아들 애덤스를 치마폭으로 감싸는 대신에 희생과 모험의 길로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훌륭한 성품은 고요하고 잔잔한 삶 속에서 빚어지지 않는단다. 왕성한 사고 습관은 역경과 싸우는 중에 형성되며, 커다란 난관이 네게 위대한 덕성을 선물하리라 믿는다. 심금을 움직이는 광경들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잘 기르고 격려하면, 그냥 잠잘 뻔했던 너의 귀한 자질들이 생명을 입고 깨어나 영웅과 정치가의 성품을 빚을 것이다”


아이를 키워보니 힘들어하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큰 아이를 중학교 3학년에 8개월 동안 인도에 보냈을 때 아이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분리불안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뱅갈루루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대로 영영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2개월정도 어학원에서 심한 향수병을 앓으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도의 거리에는 밤마다 들개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서로 거칠게 세력싸움을 하느라 한시도 들개들의 짖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모기가 어찌나 많은지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기숙사 천장이 모기떼의 까만 점들로 가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밤에 잠을 못자는 불면증이 계속되다보니 낮에 생활이나 어학원 공부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고 정신이 멍하고 집중이 안되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습니다. 불면증 증상이 심해지고 결국 아이는 병원에 가서 뇌사진까지 찍어야 할 상황이 되자 가족들이 모두가 겪은 어려운 마음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인도에서 데리고 와야하나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했던 것 같습니다. 인도의 병원에서 MRI 촬영과 여러가지 검사를 한 결과 다행이 뇌에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진단명은 ‘home sick’ 이었습니다. 불리불안으로 잠을 못자는 것이 향수병 때문인 것을 알았지만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있나 싶어서 병원을 찾았던 것이 아이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아이가 병원에 다녀와서 자신의 증상이 단순한 향수병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은 아이가 스스로 불리불안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학생활 3개월째 접어드는 때부터 더이상 유약하게 지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친구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멍한 상태로 허비하는 것도 또 시간이 되면 결국 돌아가게될 집을 그리워하고만 있는 자신도 좀더 객과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의사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지내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했던 한마디가 아이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하루하루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즐겁고 감사한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 늘 품에 안고 살았던 기타도 다시 잡고 치기 시작했고 영어공부도 차츰 흥미를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바꾸자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졌던 인도에서의 생활이 즐거워졌습니다. 주말마다 동네의 마트나 시장에서 가서 간식거리와 과일을 사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재미의 요소들을 찾고 그곳에만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인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학교의 규칙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인도의 낯선 문화와 음식들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향수병에서 점점 회복되어갔고 8개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오히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싫을 정도로 인도의 생활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워했던 점은 자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그 시기에 기타를 분해해보지 못한 점이라고 합니다. 악기 연주 뿐만 아니라 악기가 제작되는 과정과 그 원리를 궁금해 했던 아이는 인도에서 충분히 악기를 분해해 볼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아쉬워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악기의 물성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대담한 결정으로 어린 아들 존 퀸시를 외국으로 보냈던 어머니 아비가일 역시 “아들이 상처를 입으면 나는 피를 흘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심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 부모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뼈저린 아픔은 자식들이 역경과 고생에 부딪히도록 허용하는 용기를 내야 할때 부모가 느끼는 아픔입니다.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부모 학교>라는 책에서 읽으면서 그동안 아이들을 양육해온 저의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실망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요동하지 않고 그들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강한 엄마인가? 그동안 아이들이 가능하면 고통을 피해갈 수 있도록 이리저리 꾀를 부려왔던 것은 아닌가? 아이들의 실패가 마치 나의 실패인양 내 마음이 더 견딜 수 없이 아팠던 건 아닐까? 아이들의 감정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의 고통을 면하려고 애써왔던 게 아닐까?


자녀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할 수록 그들의 행복과 안락한 삶보다는 고난에 정면으로 마주치게 하도록 보호막을 거두는 것이 부모가 가져야할 가장 신성한 자녀 양육의 모습이라는 지혜를 조금씩 깨닫게 해준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중 가장 치열하게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은 18년에서 20년 정도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 시절부터 성인무렵이 될때까지 우리의 삶에 안락과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키워왔는데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던 부모의 마음이 오히려 과잉 보호속 연약한 아이로 자라게 하는 독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몇 해전 소천하신 고 이희돈 장로님은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무역협회(WTCA) 총재의 자리에 오르고 옥스포드 대학교의 종신교수가 되셨던 분입니다. 너무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 분이 아직 어린 나이에 홀홀단신 유학길에 오르기로 했을때 부모님은 편도 비행기표 한 장을 겨우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아버지의 손으로 꾹꾹 눌러쓰신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성경 말씀과 한마디 간결한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실 것이다. 너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난한 유학생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장로님은 아버지의 편지에 적힌 자신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편도 비행기표 한장만 들려 유학길에 올려보낸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저는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실감 되었습니다. <부모 학교>의 저자 게리 토마스는 “우리가 자녀에게 절대 역경의 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만큼 절대로 강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라는 것을 부모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 자체가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자녀들이 역경과 고생을 마주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부모의 지혜는 우리 아이들을 더 단단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참고

<부모 학교> 게리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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