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이집 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뿐 아니라 유아교육과에 갈 생각이 없었다. 원래 글을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아 문창과나 국어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되면 그것이 인생이 아니듯 현역에서 보기 좋게 모든 대학교에 떨어졌다. 사실 그렇게 큰 타격이 없었다. 솔직히 내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키면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재수생활에 들어갔다. 재수학원에서의 일 년은 짧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다. 어떻게든 대학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 치열한 날들이었다. 그렇게 1년의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수능날 너무 긴장한 탓에 글자가 안보이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1년의 결과가 하루에 결정된다는 그 생각이 날 사로잡았고 몸은 그 부담감과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했다.
보기 좋게 재수도 망하고 원하는 대학은커녕 모의고사보다 못 나온 가채점표를 들고 나는 동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판 동굴은 너무도 깊고 어두워 나오기 힘들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걱정하셨고 삼수는 내가 견뎌내지 못할 거 같았는지 나 몰래 대학교 추가 모집에 원서를 넣으셨다. 추가모집을 잠깐 설명하자면 추가합격 문자나 전화를 돌렸는데 학생들이 다 포기해서 결원이 생긴 학교와 과에서 추가로 원서를 접수받아 진행하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경기에 있는 한 대학교 유아교육과에 합격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과에 학교여서 합격했다는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컸다.
하지만 나 자신도 삼수는 불가한 멘탈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유아교육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미칠 거 같았다.
너무 가기가 싫었다. 학교도 그 학과도 뭐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학교를 갈 때마다 내가 재수의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받고 증명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 나의 선택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편입 생각이 있었고, 굳이 떠날 학교에 친구들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밥도 혼자 편의점 컵라면으로 먹고 공강이면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던 어느 날 학과에서 공지가 내려왔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는 주 1회 한 달간 어린이집 관찰 실습 예정입니다. 각자 어린이집 섭외해오세요~"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원하지도 않는 대학교 원하지 않는 과 게다가 관찰 실습이라니... 진짜 욕이 머리끝까지 찼었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의 돈이 학교에 들어간 터라 나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우리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집을 전화로 섭외하고 관찰 실습 가는 날을 카운트했다.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망의 실습 날!! 내가 배정받은 반은 만 2세 반으로 한국 나이 4살 아이들의 반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저귀를 하고 있었고 몸에서는 아기들이 내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 아이들을 만난 내 첫 감정은 무서움이었다. 너무 작은 아이들이라 내가 꼭 부숴버릴 거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관찰 실습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나는 좋은 어린이집을 섭외한 덕에 청소나 잡무를 하지 않고 온종일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세상에 저런 귀여운 생명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은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잘 발음되지도 않는 말로 "땡님!" 하는 아이들은 힐링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한 달의 관찰 실습을 끝내고 난 유아교육과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깔끔히 접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그 관찰 실습 이후 나는 자발적 아싸에서 벗어나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학과의 활동이나 수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내 미래 직업을 정했다.
바로 "선생님"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