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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Oct 23. 2021

베트남에서 찾은 나

 

“친구들이랑 수업 듣고 싶은데... 몇 명이면 와주실 수 있어요?”


그저 한가롭게 그릴 수 있다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다, 온라인 수업을 듣다가, 친구를 기다리며, 가족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에… 짬이 날 때마다 다해봤자 화장품 파우치 크기 정도밖에 안 되는 도구를 꺼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몇 달 후… 전 일상을 그리는 어반 스케쳐이자 그림 강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림은 저에게 소울푸드와 같습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린 시절부터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림을 그렸던 장면은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문방구에서 산 스케치북을 하나씩 채워가며 내가 그린 가상의 친구와 꿈나라를 여행했습니다. 삶의 일부분이었던 그림은 그 시절 누구나 다니던 미술학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미술학원에서는 순식간에 흘렀습니다. 미술학원은 계속 다니다 보니 국민학교 고학년 되자 자연스럽게 예술 중학교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공부를 못하거나 돈이 차고 넘치는 집 아이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일반 중학교로 진학해서 2학년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아버지 손에 끌려 미술학원을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취업이 잘된다는 과에 입학했지만 전 입학식 날 미술 동아리 방에 찾아갔습니다. 그나마 자유롭게 그림으로 채워갔던 대학시절이 지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나이가 되니 또다시 그림은 삶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취업을 하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그림은 한 발씩 저에게서 더욱더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헤어진 이 옛 친구를 생뚱맞게 베트남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별로 관심 없는 쇼핑과 걱정이 넘치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대화에서 벗어나 고요함 속에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자 너무 멀리 있어 존재조차 잊었던 그 녀석이 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낯선 이곳에서 한 장씩 한 장씩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한 발씩 한 발씩 어느새 삶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그리며, 그리 내세울 것 없는 그림이지만 SNS에 꾸준히 올렸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서 펼쳐졌습니다.



첫 그림 의뢰... 이것이 시작이었다.

동네 레스토랑에서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소에 인사하고 지내던 베트남계 프랑스인인 레스토랑 주인이 그림 그리는 저에게 다가와 그림을 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스케치북에 있는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말했습니다.


“I like your drawings. Would you draw my restaurant? I'll pay for it.”


예상치 못했던 첫 그림 의뢰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얼떨떨했지만 웬만한 요청은 뿌리 치지 않고 도전했습니다. 

그러다 블로그 댓글에 “드로잉 수업을 안 하시나요?”라는 한마디에 아무 준비도 없이 뭔가 홀린 사람처럼 ‘펜 드로잉 원데이 클래스’를 블로그에서 모집했습니다. 아무도 등록하지 않으면 조용히 내려야지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며칠 만에 수업이 마감됐고 그렇게 해외에서 그림 강사가 되었습니다.


원데이 수업은 정규수업으로 발전해서 나날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지인들끼리 수업을 받고 싶어 따로 수업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계속 그림 작업을 하면서 맘에 드는 그림 20개 정도 골라 엽서로 만들어 ‘아트 플리마켓’에서 판매했습니다. 에세이 작가인 베트남 친구와 두 번째 인쇄본의 새로운 북커버 일러스트 작업도 하게 됐으며, 단골 스카프 가게 주인으로부터 스카프 디자인 요청도 받게 되었습니다. 


무료한 해외생활에 단비 같다며 많은 분들이 좋아한 내 수업

"이 정도면 명함을 하나 따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취미로 끄적끄적 그리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직업이라고 내세울만한 연이은 행보에 놀란 남편이 말했습니다.


주재원 와이프로 살며 주어진 여유 시간에 그동안 너무나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렸을 뿐인데… 

오랫동안 잊고 지낸 ‘그림 그리는 나’를 하노이에서 찾았습니다.






아침마다 다니던 동네 요가 센터 게시판에 두 가지 공고가 붙었습니다. 

바로 요가와 필라테스 지도자 과정. 


바쁜 워킹맘으로 고질적인 목과 어깨 통증에 시달리다 베트남에 와서 삶에 여유가 생기고 매일 운동을 하면서 참기 힘들었던 통증은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아침에 조용히 운동하는 게 좋아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부지런히 수강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지도자 과정을 들으면 이 만성적인 통증과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통증이 심해질 거고 나이가 들면 허리와 다리까지 불편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때 정확한 원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영역에 과감히 발을 들였습니다. 요가보다 수업 시간이 짧다는 단순한 이유로 ‘필라테스 지도자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안 어울리는 필라테스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남편보다도 스스로 운동하는 내가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낯선 곳이기에 이 낯선 도전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 7시간씩 동작과 이론을 병행했던 지도자 과정

파릇파릇한 20대들 사이에서 이모뻘 되는 나이의 제가 안 되는 체력을 쥐어짜며 과정을 이수해 갔습니다. 몸 쓰는 거에 익숙하지 않고 운동신경도 워낙 없었지만 차근차근 이론과 실기 공부를 해가며 제 몸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수련하며 지겹게 따라다녔던 통증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지도자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 7시간 내내 공부해야 하는 기본 과정 후에 몇 차례의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영어로 된 해부학 용어를 달달 외우고 다른 강사들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이 전에 없었던 꿈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수련해서 60대가 되면 마디마디가 쑤신 동년배들을 통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요.

 

드디어 몇 개월 만에 저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필라테스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격증을 취득하자마자 센터에서 새로 만든 ‘한국인을 위한 필라테스 기초 수업’을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명함은 따로 하나 더 만들어야 하나?" 

필라테스로 번 첫 월급봉투를 받은 남편이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만성적인 통증을 치유하고 싶어 필라테스 자격증에 도전했을 뿐인데… 

한 번도 꿈꾸지 않은 ‘운동하는 나’를 찾았습니다. 




살면서 맡은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직책은 '엄마'였습니다. 

사춘기도 순하게 지나갔던 저에게 가장 큰 정체성의 혼란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 역시 어쩌다 보니 엄마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인이었지만 아직 나를 데리고 사는 것도 완성되지 않을 상태에 생명을 책임지게 된 거죠. 그렇다고 함부로 관둘 수도 없는 엄마로서의 삶에는 방향도 없고 마음도 없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고 돌까지는 사랑보다는 업무로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보다는 무너지는 나 자신에 더 마음이 쓰였고 그만큼 몸도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가져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받혀주지 않는 상태로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혹여 더 나쁜 상황이 오더라도 남편이 함께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결국 둘째 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만 잘하면 되는 인생을 살아왔던 저에게 출퇴근이 정해진 일을 하며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건 버거웠습니다. 체력도 문제였지만 어떤 마인드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가 급했습니다. 그 난제를 풀어야 앞으로 남은 긴 육아의 터널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텐데…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해외생활로 인해 그렇게 갈급했던 ‘시간’이 생긴 겁니다. 찬찬히 나를 돌아보고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선물 같은 시간이요. 하지만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연이은 국제학교 인터뷰 실패와 한국보다 더한 사교육 분위기, 인생의 여유를 골프와 쇼핑으로 소비하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귀하디 귀한 시간이 아깝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엄마로서의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대단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 혼자만의 고요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최대한 누렸습니다. 생각나는 데로… 끌리는 데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카페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서 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종일 걷다가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구경하기도 하고요. 맘에 맞는 사람들만 만났습니다. 남편이 평일에 연차를 쓰면 예쁘게 입고 밖으로 나가 둘만의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렇게 나만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갖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맞이했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장화에 비옷입고 산책을~

아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걸 해주진 않았습니다. 

그저 틈나는 대로 눈을 쳐다보고 최대한 많이 안아줬습니다. 아이들은 하교 후에는 플레이 데이트를 하거나 놀이터에서 뛰어놀았습니다. 셋이 손을 잡고 동네 카페에 가서 주스를 마시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비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함께 걸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르고 웃긴 동영상을 찍고 같이 보며 웃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아이들이었지만 그전에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낯선 땅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아이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점점 아이들과 친해지고 같이 있는 시간이 버겁지 않게 되면서 앞으로 함께 할 시간에 대한 부담감이 확 줄었습니다. 딸들과 분식집에서 떡볶이 사 먹고, 아울렛에 옷 사러 가고,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갈...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다 보니…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 되어 행복한 ‘엄마로서의 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나… ‘교사로서의 나’를 머나먼 이국 땅에서 확인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남들이 인정해주고 내 성향과도 맞는 직업이었지만, 15년 정도 같은 패턴으로 일하다 보니 커리어에도 사춘기가 찾아왔었습니다. 잠깐 멈춰서 앞으로 교사로서의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 점검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20여년을 더 해내려면 남들의 시선과 평가보다 스스로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내적 동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앞으로만 걸어갔던 발걸음을 멈추고 베트남이라는 낯선 곳에서 긴 휴가를 보내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나를 끊임없이 탐닉하며...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할 때 힘이 나고, 어떤 건 돈을 준다고 해도 하기 싫고, 어떤 상황에서 힘이 빠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나를 가장 잘 아는 나'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가 감사하고 행복하게 보낼 내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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