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sylvia Oct 18. 2021

한인 생활권 벗어나기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어디로 이사한다고요?”



밖에 기온이 40도인지 폭우가 쏟아지는지 모를 정도로 바깥과 단절되어 향기부터 다른 63층 레지던스.

하루에도 마담 소리를 몇 번씩 들으며 아이들 등원 후 한가롭게 혼자 호텔 조식을 먹고, 무료 요가 수업을 듣고, 가끔씩 골프 레슨을 받고, 주재원 와이프들과 여기저기서 쇼핑하다가 멋진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으며 온통 아이들 교육 이야기… 간혹 드라마 이야기...


베트남이 낯설 때는 팔자에 없는 마담 놀이가 흥미로웠고 비슷한 상황인 와이프들과 몰려다니는 것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일하느라 바빠 평일에도 야근 투성이에 주말이면 하루는 꼭 필드를 나갔지만, 저렴한 가격에 개인 매이드와 놀이시터까지 쓰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육아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 수업을 받고, 요가실에서 발레를 배우고, 백화점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고, 기나긴 방학에는 한국 영어 학원에 개설된 캠프를 보내며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은 어쨌든 흘러 흘러 다 똑같은 사람이 그려진 베트남 돈이 너무 헷갈려 택기 기사에게 아무거나 던져주던 초짜 시절에서 벗어나니 일상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울고불고 난리 치던 아이들도 웃으며 등교하니 한시름 놓이고요. 하지만 뭔지 모르는 아쉬움이 마음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인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 여유 있는 해외 살이. 어느 정도 큰 아이들. 달콤한 휴직.

언젠가 돌아가게 된다면 지금의 이 시간을 어떻게 추억할 것인가.

남들이 다한다고 별로 관심도 재주도 없는 골프를 연습하고, 짝퉁 옷과 신발을 쇼핑하러 다니며 대화에 끼기 위해 관심 1도 없는 다른 집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는… 이건 럭셔리 하지만 나다운 삶은 아니였습니다.

저는 분명 다른 삶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삶을 바꾸려면 공간을 먼저 바꿔야 합니다.

인생이 선물해준 황금 같은 시간에 육아와 일로 잃어버린 나와 마주하기에는 이곳은 너무 럭셔리했습니다.

파아란 하늘 밑에서 친구들과 땀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이곳은 너무 깨끗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했습니다.

이 좋은 레지던스에서 마담의 삶을 포기하고 낯선 곳으로 가겠다는 저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비싼 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한국 남자이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일반 베트남 사람들이 사는 동네나 아파트로 갈 만큼 용기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한인 생활권에서 벗어나 한명의 외국인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인들이… 특히 한국 아줌마들이 꺼려하는 외국인들이 모여있는 동네로 과감히 이사했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환경을 바꿔야 나에겐 나만의 시간을, 아이들에겐 아이다운 유년기를 선물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사한다는 말에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와이프들은 굉장히 놀랐습니다. 살고 있는 곳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의 선택을 말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용기가 부러운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서울의 이태원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집 근처 어디에서나 다양한 인종을 볼 수 있고, 동네 가게 주인들도 기본적인 영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 간 레지던스는 90년대에 지어졌습니다. 이삿짐이 들어가는 동안 계약서를 받으러 리셉션에 가니 국민학교 때 들고 다녔을 법한 오래된 열쇠를 두 개 건네주었습니다. 부엌에 냉장고는 작았고 가전제품들은 브랜드가 다양했습니다. 현관문은 고정이 안돼서 아이들이 다 나갈 때까지 계속 잡고 있어야 했고 집 안 곳곳에서 도마뱀과 눈인사를 해야 합니다. 이삿날 남편은 제일 먼저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고 넷플릭스가 잘 나오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습도가 높아 옷에 곰팡이가 잘 쓴다는 이웃의 말에 새로 구입한 제습기 두 대를 종일 돌렸습니다. 이사 첫날 계란찜을 만들다 전자레인지가 터졌습니다.


이사와서 자전거를 배운 아이들

하지만 다음날.

이 모든 불편함이 예상치 못한 일로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침 일찍 온 집안을 감싸는 낯설지만 기분 좋은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소리에 정체가 궁금해 커튼을 여니 밖에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절 깨운 건 바로 새벽부터 내린 빗소리.

63층 레지던스에서는 두꺼운 창문에 가려 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던 소리입니다. 내리는 비에 집 앞 커다란 나무가 흔들립니다. 창문으로 보이는 벽면엔 지붕에 고인 물이 작은 폭포처럼 떨어집니다. 그새 잠에서 깬 아이들은 잠옷바람으로 비를 보러 나가자고 조릅니다. 우산을 하나씩 들고 비를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아침부터 산책을 했습니다.


집 바로 옆 커다란 놀이터에는 여러 놀이기구가 매일 딸들을 기다립니다. 그네 하나 없던 고급 레지던스보다 낡아도 그네에 미끄럼틀, 모래놀이까지 할 수 있는 이곳이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낙원입니다.




이곳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막내의 유치원이었습니다.


단기간 영어를 배워야 했던 큰 아이와 1+1으로 다니기 시작한 한국 영어유치원. 언니가 성공적으로 국제학교 입성을 하고 나서도 1년을 그대로 다녔습니다. 그 1년 동안 막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둘째인 탓에 언니의 상황이 묻혀 학습 중심 영어 유치원을 보내면서 이게 과연 저 아이에게 맞는 건가 싶었습니다. 유치원 친구 엄마들은 파닉스를 더 가르쳐야 한다, 만들기 수업은 없애야 한다, 쓰기 시간을 늘려야 한다… 했지만, 전 어린아이가 하루 종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쓰는 건 고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편도 40분 걸리는 통학 시간도 맘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터진 팬더믹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상황이 나아지면서 그전부터 맘에 두고 있던 유치원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사하기도 전에 공부는 1도 안 하는 놀이 중심인 국제 유치원으로 먼저 옮겼습니다.

이사한 집에서 차로 3분 거리인 유치원을 다닌 지 일주일쯤 됐을 때 하원길에 막내가 말했습니다.

“엄마~여기는 공부를 하나도 안 해!”

“그래? 근데 너는 공부할 나이가 아니야.”

“그럼 난 뭘 해?”

“신나게 놀아!”


영어 유치원을 다닌 덕분에 알파벳을 알고 간단한 단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막내는 새 유치원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딸 반에 있는 다양한 국적의 만 5세의 아이들은 알파벳도, 숫자도 몰랐습니다. 그저 뛰고, 만들고, 노래 불렀습니다. 데리러 가면 늘 아이의 손은 꼬질꼬질하고 머리는 땀에 흠뻑 어있었습니다.

아이의 삶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자리를 잡고선 아이들이 없는 낮시간에 온전히 나에게 집중했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쇼핑을 가거나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습니다.

첫째가 아침 일찍 학교 셔틀버스를 타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둘째 등원 준비를 합니다.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근처 요가센터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잘못된 자세와 예민한 성격 때문에 30대 초반부터 어깨와 목이 망가졌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며 허둥지둥 살다 보니 통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럭셔리한 레지던스에서 마련해준 무료 요가 수업보다는, 조금 낡은 운동 센터에서 낯선 사람들과 운동하는 시간이 더 즐거웠습니다. 매일매일 고요하게 내 몸을 쓰며 이전엔 신경 쓰지 않았던 몸의 반응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기분 좋은 움직임의 시간을 갖고 다시 천천히 걸어 집으로 왔습니다. 가끔씩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서 필요한 걸 사거나 더욱 가까워진 꽃시장에 가서 좋아하는 꽃을 샀습니다. 장본 걸 정리하고 꽃은 식탁 위에 둔 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저와의 데이트 시간을 아껴야 하니까요.


단골 동네 카페

대부분의 시간은 동네 카페에서 보냈습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키고 태블릿에서 온라인 수업을 켭니다. 본업과 상관없고 뚜렸한 이유와 목표가 없어도 그냥 관심이 가고 재미있을 것 같은 수업이면 무엇이든 수강했습니다. 1년 동안 매달 30만원 정도는 제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점수를 따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그저 알고싶어 시작했기에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한 강좌를 다 들으면 다음에 듣고 싶은 게 떠올랐습니다. 의무감으로 공부했던 학창 시절에 못 느꼈던 배움의 즐거움이 제 일상을 사로잡았습니다.


배움의 즐거움에 빠지다가 자연스럽게 창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멍 때리기도 합니다. 그 시간 속에서 복잡했던 마음과 생각이 정리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갑자기 그리고 싶은 게 생각나면 늘 가방에 들어있는 그림 도구를 꺼냈습니다. 이사 오기 전부터 하노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화, 아크릴, 판화... 심지어 외국인 아티스트의 집에 가서 연잎을 붙여 말려서 만든 캔버스에 채색하는 수업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정착한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릴 수 있는 펜 드로잉.

그림 그리는 나만의 시간

그림은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의 일부였습니다. 전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림 그렸던 기억은 항상 행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를 찾는 여정에 그림은 가장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작은 스케치북에 펜으로 끄적이는 그림 한 장 한 장이 나와 만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 징검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낯선 베트남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나에게 다가갔습니다.  





이전 16화 배달과 짝퉁의 왕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