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sylvia Oct 14. 2021

Back to the 1980s’


엄마가 딱 네 나이 때 한국 같다.”

 

우리를 보러 온 친정엄마는 하노이 시내를 둘러보며 추억에 잠겼습니다. 30살 정도 많은 엄마가 제 나이였다면… 1980년대 후반을 말합니다. 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30여년 전 서울이 머나먼 이국땅 베트남에 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늙었고, 넌 이렇게 다 컸는데… 어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거 같아.”

 

칠순이 지난 엄마가 두꺼운 옛날 앨범 속에서만 꺼내보던… 40세가 다 된 제가 앨범에서만 봤던 그 성장과 변화의 시절이 4D 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첫 한 달 동안 베트남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인상은 바로 ‘더럽다'였습니다. 

하노이 시대 한복판 외국인들이 대부분인 최신식 레지던스에 살았지만 건물 바로 앞에만 나가도 쓰레기가 한가득이었습니다. 시장을 가려고  들어선 작은 골목에는 곳곳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똥들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호찌민 묘가 있는 시내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고급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선 동네에서도 어린아이와 둘이 나란히 걸을 만한 공간도 없어 앞뒤로 걸어야 했습니다. 한국 식당과 상점들이 가득한 한인타운의 인도조차 여기저기 깨져있고 울퉁불퉁해서 아이가 걸려 넘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노이 서호, 이렇게 그림으로 보는 게 제일 예쁘다.

하노이에는 홍강과 서호라는 제일 큰 호수 말고도 작은 호수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멀리서 보면 분위기 있고 아름답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면 악취가 나서 한적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동네 호수를 보러 갔을 때 아이들이 석양이 호수 위에서 반짝이는 모습에 홀려 물가에 갔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악취도 문제였지만 물가에 온갖 쓰레기가 떠있고 심지어 죽은 쥐가 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옆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영을 하고 물고기도 잡고 있었습니다.




하노이 어디를 가든 구석구석에 쓰레기 더미가 있습니다. 분리수거가 전혀 안된 채 모든 쓰레기들이 한데 섞여 있고 동네 개와 고양이들이 먹을 거를 찾으려는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사람들이 재활용할만한 물건들을 주워가기도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때 종류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분리수거에 대한 안내가 없어 한동안을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음식물을 우선 따로 모으고, 재활용 쓰레기를 종류별로 구분해 쌓아 놨습니다. 하지만 레지던스 매이드가 애써 분리해놓은 쓰레기를 모두 한 봉지에 담아 가는 걸 보고 어느 순간부턴 저도 모든 쓰레기를 한 봉투에 모았습니다. 베트남 어디에서도 분리수거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 떠올려보면 3~40년 전 서울도 비슷했습니다. 

어디 가나 쓰레기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골목에 쓰레기와 담배꽁초들이 쌓여있던 게 생각납니다. 제가 어릴 때 쓰레기를 모두 한 비닐봉지에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종량제 봉투가 생기기 전까지 빈병을 구멍가게에 팔았던 것 말고는 분리수거를 딱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닐도 오염을 다 제거하고 스티커도 다 떼어서 버려야 하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집에는 쥐덫과 바퀴벌레 제거용 진드기가 있었고 아빠가 가끔씩 뭔가 잡힌 진드기를 집개로 집어 통째로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버렸니다. 가족과 유람선을 타러 갔던 한강도 물 밑 10cm 아래가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고 냄새가 났었습니다. 명절에 지방으로 내려가던 길에 들렸던 휴게소 화장실 좌변기에 차곡차곡 변이 쌓여있었던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라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다음으로 강렬한 인상은 ‘무질서하다’입니다. 베트남 시내 도로는 거의 서바이벌 경기장입니다. 신호와 횡당보도 표시가 있지만 누구도 지키지 않습니다. 차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아무 데서나 좌회전, 유턴, 심지어 역주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도 교통질서는 안중에 없습니다. 아무 데나 건너고 싶은 곳에서 길을 건넙니다.

주차된 오토바이들이 그나마 한 명이 걸어갈 수 있는 인도를 점령해서 사람은 차도로 내려가 지나가야 합니다. 오토바이보다 큰 차들은 어떻게 저렇게 주차했을까 싶은 곳곳에 버젓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사거리나 고가도로에서 한번 차가 밀리면 아무도 양보를 안 하고 계속 직진만 해서 그대로 주차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도로 위에 서버린 차들 사이사이로 이번엔 오토바이들이 삐집고 들어옵니다. 차에 탄 사람들은 도로 한복판이든 고가 위든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립니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한국도 비슷했습니다. 

동네 골목 여기저기에 주차된 차들이 많았습니다. 누군가 우리 차를 앞에 이중 주차해서 아빠가 차주에게 전화 걸던 생각도 납니다. 명절에 고속도로에 갇혀 전라도까지 20시간이 걸렸습니다. 정지 신호가 켜졌을 때 같은 방향으로 오던 차 세 대가 모두 횡단보도를 넘지 않고 정지선에 서면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주었던 인기 예능도 있었으니까요. 

 


 

'아날로그적인 일상'도 우리의 과거입니다.

우체국 택배로 한국에서 보낸 수화물이 세관에 걸려 찾아간 기관에서 외국인 저에게 베트남어로 적힌 서류를 한뭉치 건냅니다. 모든 물품을 하나하나 적어 내라는 겁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은 뒤에 확인서를 종이로 줍니다. 이걸 잃어버리면 백신을 맞은걸 증명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상사가 보고서에 직접 도장을 찍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대부분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고 다른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비해 핸드폰으로 배달이나 쇼핑을 원활하게 할 수 있지만, 공식 문서나 중요한서류를 처리할 때는 아직까지도 아날로그 식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돈에는 모두 같은 인물이...

 식당이나 마트에서 계산을 할 때도 카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카드 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카드기도 고장 나는 경우가 허다해서 꼭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도 베트남 동화는 동전이 없어 지폐만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국에선 웬만한 서류는 인터넷을 통해 신청하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민원 서류를 인터넷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접종을 하면 모든 기록이 웹에 기록돼서 어떤 병원에서나 조회가 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결재받으러 교장실을 서성거리다 결국 교장선생님을 못 만나서 다음날 결제받았던 일도 허다했는데… 이제는 아침 조회시간 외에 교장선생님을 대면할 일이 없습니다.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핸드폰으로 신청하고 잔여 백신 알림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비롯해서 적립카드, 회원카드까지 들고 다니려면 필요했던 커다란 지갑이 이제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머니 클립에 약간의 현금만 챙기고 외출합니다. 모든 카드는 휴대폰 안에 들어있으니까요.

 



병원과 약국의 풍경도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러 간 하노이 시내 한 보건소는 대학교 때 농활 차 갔던 안동 시골마을 보건소보다도 열악했습니다. 하얀 타일이 깔려 있었지만 내부는 너무 더럽고 누우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 침상이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는 친숙한 악취가 났습니다. 2차 접종을 하러 갔던 로컬 병원은 더 놀라웠습니다. 4층 정도의 큰 건물이었지만 벽과 바닥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부서진 베트남 전쟁 영화에서 본듯한 병원이었습니다. 사실 외국인들은 의사소통 때문에 로컬 병원을 갈 일이 없는데, 설령 통역이 되더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외국인들을 병원이라 하더라도 정형외과적 수술이나 안과질환, 피부질환, 혈관질환 등을 제대로 치료하는 병원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인 친구는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에 혹이 보였지만 베트남에서는 악성인지 확인할 수 없어 결국 일본으로 갔습니다. 한국 아이들이 놀다가 다리가 부러지면 코로나 전에는 응급처치만 받고 한국에 갔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병원 진료비는 어마어마합니다. 대부분의 한국인 주재원들은 회사에서 의료보험을 들기 때문에 실제 병원비에 대한 걱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진료 직후에 우선 개인이 지불하고 나중에 보험회사로부터 환불받기 때문에 진료비가 얼마 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열도 없고 기침을 좀 해서 병원에서 진료받고 약을 3일치 타면 백만동, 즉 5만원 정도 나옵니다. 항생제 처방이나 엉덩이 주사라도 맞으면 한 번에 7만원이 넘어갑니다. 계산을 할 때마다 저게 다 내 돈이었다면... 하는 생각에 머리가 쭈볐합니다. 개인이 모두 부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병원은 멀고도 먼 곳입니다.

 

80년대, 국민학교 입학 전에는 우리나라에 '국민의료 보험제도'가 없었습니다. 열이 자주 났던 어린 저를 안고 병원을 갈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는 엄마의 말이 베트남에 오니 너무나 이해됐습니다. 기침이나 조금 찢어진 상처에도 걱정 없이 병원으로 향할 수 있는 우리의 현재에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베트남 동네 약국

이러한 의료체계에서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원하는 만큼 약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년 전 의약분업으로 인해 의사의 처방전 없이 대부분의 약들을 임의로 구입할 수 없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베트남에서는 일반인의 판단대로 약을 살 수 있습니다. 따로 제한이 없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약을 먹을 만큼 소분해서 주지 않고 병채 구입하게 합니다. 그래서 받아온 약을 다 먹기 전에 병이 낫는 경우가 많은데요. 열악한 의료보험 제도로 인해 동네 약국에서 진통제 100알을 병 채 살 수 있는 미국처럼 베트남에서도 타이래놀이 가득 든 통을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한국보다 뒤처졌다고만 생각했던 베트남이... 찬찬히 살펴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그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그들의 미래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작부터 너무 다른 서구 열강이나 석유가 터지고 자원이 많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듯

베트남인들은 한국에서 그들의 찬란한 미래를 보는 걸까요?






















이전 14화 화려하고 강인한 베트남 여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