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눅에 대하여
문제라면 그게 문제였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엄마와 똑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딸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맞벌이를 해서 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따금 나를 데리고 아이들이 있는 동네의 구멍가게 앞이나, 놀이터 같은 곳에 나가곤 했다. 나는 어려서 병치레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과보호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엄마는 그런 나의 등을 툭툭 떠밀면서 말했다.
어서가, 어서 가서 얘들아 놀자 해봐! 옳지, 옳지. 어서가.
나는 엄마의 말대로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얘들아 놀자! 고 말했다. 아무리 아이들이지만,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이를 선뜻 받아줄 리 없었다. 나는 아이들의 까칠까칠한 반응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풀이 잔뜩 죽어서 엄마 품으로 달려가면, 엄마는 다시 나를 내몰았다. 어서가, 어서 가서, 애들하고 놀자고 해봐! 그 애들에게도 불편한 감정이란 것이 있었지만, 엄마가 그것을 이해할 리 없었다. 아이들은 더 거세게 나를 내쳤다. 그냥, 밀려나는 정도면 좋지만, 가끔은 아이들의 무리 밖으로 떠밀려서 바닥에 내농댕이 쳐지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그 야멸찬 거절은 어린 나에게 참으로 쓰리고 아픈 상처가 되었다.
어쩜 그렇게 미련한 것까지 엄마를 닮았을까? 나는 문득문득 떠 오르는 기억들을 살피며 끌끌 혀를 찬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밀려나던 여자아이는 벌써 중년이 되었다. 이제는 퍽이나 덤덤하게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내 마음의 상처가 몹시도 깊었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내 눈에는 나의 상처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주눅이 들어만 갔다. 왜냐하면, 내가 다가가는 사람들 마다, 내가 다가가는 것만큼 그들은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싸늘한 거절이 내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왜 그렇게 사람이 작고 초라해지는지...
마음에 생겨난 상처의 재료는 감정이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묵은 감정이 상처가 된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미묘한 친밀감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 익숙한 것에서 마음에 한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그래서 감정도 켜켜이 시간의 층을 쌓아야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마흔도 훌쩍 넘어서야 겨우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