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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영리하다

주눅에 대하여

by 재요

어른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반대다. 성인이 된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얼마나 잔망스럽고 되바라졌던가를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황순원 선생의 단편 소설만 봐도 그렇다. 그 어린것이 뭘 안다고, 죽을 때 소년과 함께 있었을 때의 옷을 입혀 묻어달라고 했을까. 그런 이야기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서는 알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변의 어린아이가 애 답지 않은 소리를 하면 기겁을 하면서 놀라는 시늉을 한다.


어른들만 숫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니? 몸무게는 얼마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니?" 따위만 묻는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애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고 믿는 것이다.


그건, 비단 어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요즈음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반에 전학 온 새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 그 집은 몇 평인지, 그 아이가 쓰는 핸드폰이나 컴퓨터의 사양은 어떻게 되는지, 공부는 잘하는지. 그 모든 것이 파악되고 나면, 아이는 새 친구를 자신의 무리에 끼워 줄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누군가는 순진무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어른에게 배워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를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삶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애들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숫자에 민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리 만만치 않았던 내 유년시절의 친구들을 나무라고 싶지 않다. 알고 보면 친구라기보다 각다귀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지방에 살던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오면서 갑자기 가난해졌다. 정원이 딸린 널따란 저택에서 살다가 하루아침에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끼어 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새 학교로 전학을 와서 새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지금껏 내가 알던 옛날 동네의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작은 어른' 같다고나 할까? 그들의 은근한 '관찰과 맛보기'에 우리 집 형편이 탈탈 털리고 말았다.


그랬다. 또 혼자였다.


나는 또다시 잔뜩 주눅이 들어서 쫄보가 되었다. 겉으로는 독기가 잔뜩 올라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녔지만, 어린 속은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날마다 남자애들이 무리 지어 내 뒤를 따라오며 등 뒤에 발길질을 하고 달아났다. 그런 날이 일 년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엄마 아빠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그들의 부모를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손님은 왕이었다. 그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나 하나 우는 양을 한다고, 우리 부모에게 어쩔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 또한 어른들의 논리에 민감하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린 내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는 첫 단추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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