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눅에 대하여
엄마는 올해로 딱 여든이 되셨다. 요즘 인기 드라마인 '폭삭 속았수다'에 나오는 오애순 여사처럼 산전수전에 공중전도 겪으셨다. 드라마의 오애순 여사는 남편이라도 듬직했지, 우리 아빠는 가장 노릇을 하는 데 소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일찌감치 맞벌이 아닌 맞벌이를 위해 세상에 뛰어들었다. 자식들을 건사하는 데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 무서운 것이 하나 없었다. 딱 한 가지.
천둥소리만 빼고.
엄마는 말한다. 비 오는 날 천둥 치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느이 아버지를 내팽개쳤을지 모른다고.
어려서부터 주눅이 드는 일이 많다는 것은 망가지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망가지는 일이 많으면 무서운 게 별로 없다. 주눅의 좋은 점이라면, 그런 게 아닐까. 아무튼 그 때문에,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늘, '저년, 저년 눈깔 보라. 겁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눈깔 좀 보라.' 하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었다. 그런 나도 딱 한 가지 무서운 것이 있었다. 바로,
우리 아빠의 호통소리.
아빠는 유난히 목소리가 컸는데, 어려서부터 내가 늦게까지 잠자리에서 뒹구는 꼴을 참고 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벌컥벌컥 '안 일어나니? '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곤 했다. 그래서 그게 별거냐고?
가끔은 몸이 몹시 피곤하거나,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이 있을 땐, 자다가도 환청처럼 아빠의 호통 소리를 듣곤 한다. 나는 그게 몹시도 화가 나고 약이 오른다. 이제는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된 아빠에게 심적(心的)으로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호통 소리보다는 그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