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눅에 대하여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아홉 살 무렵이었다. 그전까지는 지방 소도시에서 살았다. 아무리 돈 버는 일에 소질이 없는 아버지라도 운이 좋은 때가 있다. 우리 가족이 지방 소도시에서 살 무렵이 바로,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의 사업이 제법 잘 되어서, 우리 가족은 동네에서도 잘 알려진 좋은 집에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 적산 가옥이었는데, 방도 많았고, 포도밭이 딸린 넓은 정원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차례 교통사고를 겪고 나서 병치레가 심했다. 많이 놀란 탓에 자주 경기를 하거나 체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니던 유치원도 그만두고 늘 할머니 치마폭에 휩싸여 집에서만 지냈다. 하루 종일 맨발에 속옷차림으로 그 넓은 집 마당에서 뒹굴며 지냈다. 때문에 내 두발은 늘 흙투성이의 까만 발이었다.
어느 날엔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놀러 왔다. 그 무렵엔 요즈음처럼 인심이 사납지 않았다. 아마도 그 어른은 내가 봤던 다른 어른들처럼 우리 집 구경을 왔던 이웃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할머니와 나는 그 이웃들이 가져온 옥수수며 고구마, 부침개 같은 것들을 자주 나눠먹곤 했다. 그 어른은 자신의 집에도 내 또래 사내아이가 하나 있다며 나더러 놀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나를 치맛폭에서 떼어놓는 게 마냥 심난한 눈치였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성격 좋은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다. 그래서 마치 우리 집 아이를 남의 집에 주는 것처럼 나를 그 할머니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이웃 할머니의 집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 새댁 아줌마는 늘 내가 오면 걸레를 들고 따라다녔는데, 아마도 나의 흙투성이 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 집엔 내가 늘 그림책으로만 보던 할아버지도 있었고, 새댁 아줌마의 남편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내 또래의 남자아이와 형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집에는 없던 장난감이 꽤 많았다. 우리 집은 내가 가지고 놀던 소꿉놀이 세트만 한가득이었는데, 그마저도 지방으로 이사를 내려오며 다 치우고는, 인형 한두 개가 남아 있었다. 그런 내 눈길을 끈 것은 블록장난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레고를 본떠서 조금 크게 만들었던 장난감이었던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가지고 놀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나를 반기지도 않는 집에 가서 잘도 놀았다.
그런데 그 집에 가면 참 이상한 게 있었다. 내가 오는 것을 그리 반기지도 않으면서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남의 집 아이가 집에 와 있어도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말도 잘 걸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들끼리 말이 자주 오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내 또래의 남자아이나 학교에 다니는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내가 블록 장난감을 독차지하고 놀면, 내놓으라던가 같이 놀 자던가 하는 말이 없었다. 곁에서 다른 것을 가지고 놀긴 했지만, 나와 어울려 놀지는 않았다. 그 남자애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을 걸어도 응, 아니, 대답만 할 뿐, 나와 놀아주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집안에서 재잘거리고 떠드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어쩌다 그 집에 발길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후에 병치레를 오래 했거나 서울 친척집에 다녀오면서 발길이 끊어진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늘 그 집 식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다. 뭔가 속상한 사연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그들의 침묵과 고요함이 항상 무겁게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집에는 아무리 심심해도 우리 집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적막감과 냉담함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가족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집의 할머니는 우리가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고 새댁 아줌마도 시장에서 곧잘 마주쳤다.
그냥, 어린 내가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마주한 새로운 세상의 낯선 정서가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