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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어린 불청객

주눅에 대하여

by 재요

다리 건너 동네는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아직 우리 가족의 서울에 올라오기 전, 이야기다.


나는 지방의 소도시에 살았는데, 산업도시이긴 했어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던 동네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되긴 했어도 단정한 집이 많았다. 집집마다 담장은 밝은 회칠이 되어 있었고, 대문은 빤닥빤닥한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동네가 시작되는 입구에는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커다란 느티나무도 있었고, 그 나무 아래에는 끄트머리부터 허물어져 가는 문방구도 하나 있었다. 지붕이 하얀 교회당도 있었다.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여관도 하나 있었는데, 지금처럼 얄궂은 용도가 아니라 정말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었다. 옛날에는 여관에서 식사도 제공했는데, 밥이 참 맛있었다. 우리 집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밥때만 되면 숟가락을 들고 여관집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떼를 부리곤 했었다. 내가 굳이 숟가락을 챙겼던 이유는 어른용 밥숟가락은 감당도 하지 못할 만큼 무겁고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동네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늘 호기심을 느끼는 곳은 우리 동네에서 멀찍이 떨어진 다리 건너 동네였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그곳으로 하얀 옷깃에 까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과 그리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군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줄을 지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침에 식구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 그들을 따라갔다가 길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동네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이웃집에 살던 언니네가 다리 건너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언니는 나와 대 여섯 살쯤 나이 터울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몹시도 부산스럽고 변덕이 심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동생이 없어서였는지 나를 참 많이 이뻐했다. 언니는 이사를 간 후에도 우리 집에 여러 번 놀러 와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언니의 여름방학 무렵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언니가 자기네 집에 놀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걱정이 많은 할머니는 늘 그렇듯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떼를 쓴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다리 건너 동네가 아니던가. 결국에는 종일토록 떼를 쓰고 나서 오후 무렵 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다리 건너 동네는 우리 동네와 달리, 한산하고 조용한 시골동네였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는 아침에 무리를 지어 가던 학생들의 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교문을 나오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학생들도 몇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시시해졌다. 우리 동네처럼 구멍가게도 없었고, 양옥집도 몇 채 되지 않았다. 논과 밭만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 여름에 누런 이삭이 패어있던 것을 떠 올리면 대부분 보리밭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해가 있는 동안은 언니와 재미있게 놀았다. 이웃에 사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불러줘서 고무줄도 배웠고, 데덴찌 하는 법을 배워서 편을 먹고 사방치기를 하기도 했다. 언니의 아줌마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 반찬을 해준다고 했다. 옥수수도 먹었고, 환타가루를 탄 물에 수박화채도 만들어 먹었다.


창 밖에는 서서히 붉은 노을이 짙어지면서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은 멀찍이 떨어진 제 집으로 모두 돌아가버렸다. 언니네 집은 휑한 보리밭 한가운데 있는 넓은 집이었는데, 나 혼자 마당에 앉아 있으려니 괜히 쓸쓸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언니도 밀린 숙제를 하기 위해서 제 방으로 돌아가고, 온 동네에 밥 짓는 냄새만 가득했는데, 자꾸만 집에 있는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한 번은 기어코 가보고야 말리라 생각했던 다리 건너 동네는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텔레비전이 있어도 텔레비전을 볼 수 없는 난시청지역이었던 것이다. 그건, 나와 같이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어린아이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더 이상 다리 건너의 동네는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낯선 동네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낯설고 쓸쓸한 동네에서 저녁을 맞이하던 나는 텔레비전을 볼 수 없다는 좌절감 하나로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줌마가 내 쓸쓸함을 알았는지, 한참을 등에 없고 달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내가 좋아하는 병어조림을 저녁반찬으로 내놓았지만, 이미 서러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저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초의 노스탤지어고, 허전함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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