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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눅은 치약자국 같은 것

주눅에 대하여

by 재요


주눅은 빨간 겨울 블라우스에 희끗하게 묻은 치약자국 같은 것이다.


내 마음에 남은 기억이 그렇다. 세일러복 스타일의 아래위 한벌이었는데, 대여섯 살 무렵의 나는 상의 가슴팍에 늘 히끄므레한 치약자국을 묻히고 다녔다.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서였을까? 그 옷을 입고 어릴 적 사진에는 죄다 그 얼룩이 남아있다.

그 얼룩은 말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담고 있었다. 잘 씻지 않는 아이, 어른들로부터 이렇다 할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 이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바빠서 그런 걸까? 하는 의구심까지...

그리고 그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나를 늘 난처한 상황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그게 아니면, 혼자서는 다스릴 수 없는 힘든 감정을 강요받았다.


어른이 되고 보니 이제는 누구를 탓할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그 히끄므레한 얼룩을 가슴팍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십 년도 넘게 달고 다녔다. 아침 무렵 어지럽게 널어진 이불틈에서 그 사연 많은 옷을 입고 해맑게 웃는 아이도 이제 쉰이 넘은 중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나이도 먹지 않고 그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불쑥불쑥 내 앞에 나타난다. 그 애가 지나가고 나면, 나는 늘 기분이 더러워진다. 더러는 그 애가 입고 있는 옷에 묻은 치약자국 때문에 내가 당당해져야 할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의 탓을 할 처지가 못된다. 한동안 마음속으로 숱한 원망을 퍼붓던 엄마와 아빠도 여든이 넘었다. 이제는 되려 나에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데,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나 또한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키워서 '어른' 소리를 들어야 할 나이를 훌쩍 지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내 마음에도 세탁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인가, 잔뜩 주눅이 들었다가 정신이 돌아온 날이었다. 그런 나 자신에게 화는 나는 데, 화풀이할 대상이 없었다. 그러다, 눈앞에 쿠팡에서 배송 온 꾸러미가 보였다. 안에 든 것은 얼룩제거제였다. 살다 보면, 거짓말처럼 이렇게 앞뒤가 착착 꿰어 맞춰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하얀 스웨터에 기름이 튀어 얼룩이 졌다. 그걸 지우려고 시킨 것이었다. 드디어 화풀이 대상을 찾은 듯싶었다. 얼룩제거제를 스웨터 위에 방울방울 튄 얼룩에 칙칙칙 수도 없이 뿌리고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성능이 생각보다 탁월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문득,


내 마음도 세탁이 필요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오십 년 살아온 세월에 그깟 치약자국 하나쯤 못 지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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