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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 1편

주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by 재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러나 낭만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구성원이 많지 않은 조직일수록, 그 안에서 일어나는 기싸움은 치열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암투는 늘 신경전으로 곤두서고, 그 사이에 편을 가른 무리들은 다른 편을 헐뜯느라 여념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씹어대는 키보드질의 내용을 침묵 밖으로 끄집어내 보자면, 이런 진흙탕 싸움이 없고, 이런 개싸움이 없다. 다만, 겉으로만 고요하고 조용할 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기억이다.


분쟁의 시작은 업무의 우위나, 주도권이 아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와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글쎄, 내가 기억하는 분쟁의 시작은 사무실의 책상 배치를 바꾸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뭔가 불편한 심기의 그녀는 어느 순간 심각한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려고,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 나를 옥상으로 불렀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동안 뜬금포를 자주 쏟아내는 그녀였기에 이번에는 무엇으로 시비를 거시나, 이런 심정으로 나는 그녀에게 대꾸했다. 왜?, 또?, 뭐?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애써 인터폰 라인을 연결하고 있는 데, 왜 설치업자를 불러서 자신을 망신 주느냐는 이야기였다. 어허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개념이 없기로서니, 이런 개소리를 운영팀장에게 씨부리고 있는 너는 도대체 뭐냐? 싶었다. 관두자고 했다.


내 안에는 낭만 대신, 소리 없는 우월감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간에 일어난 그녀의 여러 가지 만행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만행이라... 우선은 내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의 타이어를 카터칼로 쑤셔 넣은 것. 출장수리기사가 일러준 말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을 일부러 캐내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업무적으로 불량한 직원에게 무척이나 엄중하고 공식적인 경고를 보냈는데, 그 엄중한 경고를 죽 쑤어 버린 것. 너처럼 개념 없는 것이나 할 짓이지. 무시해 버렸다. 그다음엔 내 중국 출장 비자를 날려먹었으나, 내가 아는 그녀는 그러고도 남았기에 여행사에 연락을 해서 24시간 만에 급행비자로 해결해 버렸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에게,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사람 좋게 위로했다.


내가 기다리는 건, 그녀 스스로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닥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생각보다 내 바닥은 그녀의 바닥보다 얕았다. 그놈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이 뭔지. 내가 그녀를 잘 아는 만큼, 그녀도 나를 잘 알았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암팡지게 나의 발 뒤꿈치를 깨물어버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근거 없는 소문들로 따돌림을 당하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그만큼 예민하고 못 견뎌했다. 게다가 나는 공과 사를 가리는 것에 매우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건 회사의 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타인과 친화력이 좋은 그녀는 나의 약점을 무척이나 잘 알았다. 나는 결국, 그녀의 근거없는 중상모략(?)에 걸려들고 말았다.


서로를 진흙탕에 끌어들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머리채를 잡고 개싸움을 하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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