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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자란 아이

주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by 재요


나는 회사를 보는 눈이 없다.


그래서 친한 지인이 보증(?)해주는 회사가 아니면 꼭 사기를 당하거나 된통 고생을 하게 된다. 오늘 이야기 속의 회사도 그렇게 속아서 들어가고, 고생도 된통 한 곳이다.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나는 곳이다. 나는 늘 약은 체 하지만, 실상은 그만큼 허당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참으로 아사리판 같은 회사였다.


아사리는 경상도 방언으로 덤불더미를 말한다. 일본말로는 조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의미는 뭐 거기서 거기다. 덤불이 널려있던, 조개껍데기가 발바닥에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밟히든 간에, 엉망진창인 것은 마찬가지다. 월급만 믿고 덜컥 출근을 약속한 나는 날마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나는 매 순간 멘털이 붕괴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단한 상황을 감내하기 위해 나는 늘 점심식사를 불맛의 매운 엽기 떡볶이로 대신했다. 그리고 그 떡볶이를 함께 나눠먹으며 그녀 W를 만났다.


나는 늘 누추했지만, 그녀는 나를 공주님 같다고 했다.


그녀는 맨 처음에 나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그녀의 퉁퉁하고 정 없는 말투가 나도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나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주눅은 주눅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나의 초등학교 후배였다. 비록 6학년에 올라갈 무렵 전학을 가느라,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 가장 오랫동안 다닌 학교의 후배였다. 동네도 같았고, 함께 아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내려놓으며 참, 편안하게 말했다.


난, 언니가 강남에서 자란 공주님인 줄 알았어요. 누가 알았겠어. 나 같은 시장 떼기인 줄...


시장 떼기, 그랬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정체였다.


언젠가 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자긴 아무리 씻고 닦고 향수를 퍼부어도 몸에서 누룩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그 애의 부모님은 청량리 시장에서 방앗간을 했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쌀을 찌고 떡을 했는데, 그 냄새가 오랜 세월 눅어지면 누룩냄새처럼 변한다. 그 성실한 부모님 덕에 그 친구의 집은 꽤 부유해졌다. 그래서 자기 월급이 아니더라도,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가방 한 두 개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었는데, 그 누추한 기분의 누룩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하던 엄마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우리 가족은 식당에 딸린 방 두 칸에 모여 살았다. 우리 식당은 젓갈을 파는 가게와 단무지 공장 옆에 있었는데, 내 몸에서는 늘 그곳에서 나는 찝찔한 냄새가 났다. 엄마가 아무리 좋은 비누로 씻기고 목욕을 자주 다녀도 그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건, 나뿐만 아니었다. 시장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길 건너 아파트에 살지 않는 이상, 대부분 아이들에게서 나는 냄새로 어디에 사는 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그녀는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겉모습은 강남 한가운데 가져다 놔도 별 손색이 없을 만큼 말끔한 오피스걸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형편이 없었다. 그 시절의 시장 떼기 그대로 늘 주눅이 들어서, 그 주눅을 가리고자 겉치장에 신경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정반대였다. 겉모습은 이제 막 시장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형편없었다. 부스스하고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서 머리 위로 틀어 올리고, 얼룩이 묻고 목이 늘어난 맨투맨을 입고 출근을 했다. 게다가 상당한 비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 눈동자는 영민함으로 빛났고, 그 엉망진창인 회사 안에서도 자신이 할 일들을 찾아내어서 기막히게 정리하고 제 몫을 챙겼다. 게다가 입바른 소리도도 누구에게나 돌려 말하지 않고 잘도 했다. 그러나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잘 자란 어른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아기 돌잔치였다.


내가 제대로 자신을 꾸민 그녀를 본 것도 그때였다. 그녀의 말로는 결혼식 이후 처음이라 얼굴이 뻑뻑하다고 말했다. 그녀들이 가진 것들은 내가 아직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아기, 그녀의 남편, 그녀의 시댁식구들, 그녀가 맞고 있는 돌잔치의 손님들... 그녀는 그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친근했다. 나는 어쩐지 그녀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덩치만 어른인 아이. 어쩌면 그래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두고두고 그녀가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어쩐지 내가 바라는 미래의 한 단락을 마주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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