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밥집을 하는 그녀

주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by 재요

나는 대학시절 내내 등록금을 직접 벌어야 했다.


부모님이 젊었던 시절과 달리, 한번 기울어진 가세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나는 남들보다 사 년 정도 늦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무렵은 다름 아닌 IMF 시기였다. 게다가 남동생도 재수를 하던 시절이라, 우리 가족들은 가만히 있어도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였다. 각자도생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남동생은 재수학원 대신 아버지가 소개해준 산사로 떠났고, 엄마는 당시 유행하던 백년초 선인장의 열매를 받아다 노상에서 팔았다. 나는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열 시간도 넘게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엔 주유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다음엔 캐셔자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야간시간 캐셔의 시간당 급료가 높아서 나중에는 야간시간에 일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엄마와 나는 도봉산 끝자락에 분식점을 낼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힘들었다. 막내 외삼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외숙모가 그곳에서 조개구이 장사를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장사를 접게 되었다. 가게의 계약기간이 꽤 오래 남아서, 엄마와 내 차지가 되었다. 처음엔 말 그대로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분식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싶다. 등산로 주변의 분식점이라니, 주말을 제외하고는 장사가 되지 않았다.


당시는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때이기도 했다. 한창 다리가 복구 중이었다. 때문에 도봉산에서 성수대교 북단까지 셔틀버스가 임시 운행되고 있었다. 새벽에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버스기사님들의 아침밥을 해결할 때가 없었고, 때 마침 배차 담당자의 눈에 우리 집이 들어왔다. 소심한 엄마는 엄두를 낼 수 없어 손사래를 쳤지만, 그때만 해도 계산이 탕탕탕 잘도 돌아가던 나는 호기롭게 해 보마고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나는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도봉산 가게까지 달렸다.


겨울에는 아침밥 내는 시간이 조금 늦쳐져서 새벽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무튼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서 우이동을 떠나야 하는 고단한 일과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전날 엄마가 준비해 놓은 국을 데우고, 손질해 놓은 야채들로 반찬을 만들었다. 그렇게 기사님들에게 아침상을 내놓았지만, 워낙 초보인 탓에 늘 싫은 소리를 들었다. 아침마다 늘 부족한 식사를 하신 기사님들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서 나온 돈으로 집안의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남동생의 학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젊은 아가씨에게 '밥집 사장님'이란, 빵구난 양말 밖으로 나온 발가락 같은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친한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나의 동기들은 나보다 많게는 네 살, 그 밖에는 한두 살이 어렸다. 나는 그녀들에게 강의를 마치고 나오며 핫도그 한 두 개를 선심 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건은 아주 우연 찮은 곳에서 발생했다. 친구들과 이대 앞에 놀러 갈 생각으로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 선, 버스의 문이 열리면서 매우 낯익은 버스 기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시던 기사님 중 한 분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사장님 여기서 다 보네.


나는 그 자리에서 발간 몸뚱이가 된 것처럼 창피함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찌나 딱딱하게 굳어버렸는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슨 정신에 그를 떠나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남들은 다 아는 사실을 나 혼자 모르고 살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졸업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결혼식을 하면서 동기들 몇몇이 모였다. 나도 밥집을 그만두고 어엿한 회사원이 되었다.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그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내가 못 본 사이 무척이나 세련되었다고 칭찬을 했다. 다른 친구들도 맞장구를 쳤다. 처음에는 그 칭찬이 듣기 좋았으나, 뭔가 쿰쿰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언제는 촌스러웠나? 하고 무심히 중얼거렸다. 애들이 깔깔댔다. 나에게서는 늘 고소한 반찬냄새가 났다고. 그래서 식당에서 알바를 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단다. 게다가 부스스한 머리는 하늘높이 틀어 올리고, 화장기 하나 없이 칠부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학교에 오던 것이 나였다고. 그런 증언(?)들이 친구들의 입에서 하나 둘 터져 나왔다.


숨길 수 없는 것은 사랑과 재채기만이 아니었다.


사기꾼이 아닌 이상, 삶의 흔적 또한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 무렵에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예전의 얼어붙을 것 같은 창피함 대신에 뭔가 한없이 편안한 안도가 나를 찾아왔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 마냥, 타인의 삶을 날을 세워 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뭔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7화시장에서 자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