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니까 사랑입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글 하단 참조). 사랑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취지에서 쓴 글이다. 결혼 27년 차로서 권태감에 푹 절인 오이지처럼 살아간 지 꽤 되니 그런 글이 나온 것 같다. 이젠 쉬이 상할 염려 없는 이 염장식품 상태가 편하다. 내 마음의 권태감만으로도 수분 기를 잃고 쭈굴쭈굴해진 상태인데 상대방 또한 오죽하랴 하며 지내다 보니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의 근원이 나의 권태로움이라는 게 좀 슬프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적인 결혼 생활에 대한 바람을 구석에 치워버린 지도 꽤 되는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속들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왔다. 만나면 남편과의 갈등을 하소연하던 친구들도 결혼 십수 년 년 차가 지나가면서 거의 해탈한 분위기에 이르렀다, 싸울 일이 없어졌다기보다 싸울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어쩌면 에너지를 소모한 만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지친 건지도 모른다. 어쩌겠나.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 걸. 이젠 다들 상대방을 바꾸겠다는 전투 에너지를 삶의 다른 영역에 투입하고 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 뭐' 하며, 문제를 흐리며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고 살아가던 중이다. 최근 들어 예외적인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중충한 그레이톤이나 챠콜 색 분위기였던 주변 친구 중 갑자기 코랄빛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가 나타난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분위기의 변화도 카톡 프사로 알게 된다.
어느 날부터인가 한 친구는 카톡 프사에 매일 다른 술안주를 예쁘게 세팅해 찍어 올린다. 그 친구는 남편의 잦은 음주 문화로 다투다가 지친 상태였다. 알고 보니 요사이 코로나로 음주 문화 쇠락기에 들어서자 친구 남편은 집에서 친구와 같이 와인을 마신다고 한다. 그 친구는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 메뉴 개발하기에 정신없다고 엄살을 핀다. 막상 그 상황을 전하는 카톡 한 글자 한 글자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이를 코로나 재결합이라 봐도 좋은지 모르겠다.
이런 코랄빛의 등장은 같은 아파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늦은 오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2층을 누르고 잠시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바로 다음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아랫집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탔다.
"안녕하세요."
"어디 나가나 봐요? 요즘 잘 못 봤네요."
"네. 요즘 낮엔 잘 안 나가서요."
아랫집 할머니는 작은 아이 초등학생 때, 같은 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좀 더 친숙하다. 할머니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할아버지까지 엘리베이터를 타니 아무래도 말을 고르게 됐다. 뭔가 말을 해야겠는데 이도 아닌 것 같고 저도 아닌 것 같아 시선을 건넸다 거뒀다 하고 있었다.
잠시 애매한 분위기가 흐르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할머니가 누른 지하 1층에 이르렀다. 할머니가 내리면서,
"그럼 잘 다녀와요. 우리는 운동하러 가요"라고 했다. 그 말 하는 할머니 표정에 선홍색 미소가 스며있다.
"네 안녕히 다녀오세요."
할머니의 미소에 취했던 걸까? 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두 분이 걸어가는 걸 한동안 바라봤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사 온 지 오래돼 할머니 할아버지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적은 수없이 많다. 보통 지하 1층에서 내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먼저 앞서 나가고, 할머니는 한참 뒤에서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고 할아버지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곤 했다. 같이 있지만 같이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늘 본 두 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걸어간다. 두 분 사이를 가로막던 무언가가 해제된 느낌이었다.
올 초, 할머니를 아파트 입구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들어오면서 이야기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퇴직하고 나니 갑자기 시간이 많잖아요. 그래서 남편이 하던 운동을 나도 배웠죠. 처음엔 따라 하기도 힘들더니 이젠 같이 부부동반으로 팀 만들어 다니고 그래. 내가 그동안 어떻게 일만 했나 싶네(할머니 말씀엔 반말과 존댓말이 잡곡밥처럼 늘 뒤섞여 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지금 두 분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에 할머니의 그때 그 말씀이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그 뒷 배경으로 연상되는 꽃나무가 있다.
< pixabay dae jeung kim님의 이미지>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동안 피어있는 걸로 알려졌다( 브런치 이웃 착길작가님 글에서 이 나무를 처음 알게 됐다. 아래 참조). 사실은 배롱나무 꽃 한 송이가 100일간 피어있는 게 아니라 여러 꽃이 이어 피는 것이다. 오늘 핀 꽃이 지고 나면 그 옆 자리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꽃이 100일 동안이나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 겪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은 배롱나무를 보고 ‘어제저녁에 꽃 한 송이 지고 오늘 아침에 꽃 한 송이 피어 서로 일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게 한 잔 하리라’라고 읊었다고.
멀리서 보면 꽃이 계속 피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송이가 폈다 지면 다른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
금슬 좋은 부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외부에서 보기엔 늘 사이가 좋은 부부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권태에 시드는 때도 있고 다시 피어나는 때도 있어서 100일이나 붉은 꽃나무로 보이는 것일 게다. 그들의 비결은 권태에 빠지지 않는 게 아니라 권태로 시든 꽃송이 옆에 다른 꽃송이를 끊임없이 피우는 것 아닐까 싶다. 어쩌면 결혼 생활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닌 이어달리기처럼 해 나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장미꽃으로 알고 산 나는 한번 핀 꽃이 시드는 걸 인생의 순리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때만 순응적이다). 어쩌면 내가 장미에 비유한 결혼 생활은 나태한 태도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노년 부부의 배롱나무 꽃 같은 화사함에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품게 됐다. 내가 한 송이 꽃이 시드는 것만 바라보며 푹 절인 오이지로 살아갈 때, 그 노년 부부는 또 다른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이 지는 게 당연하듯이 권태가 찾아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다만, 노 부부처럼 지는 꽃 옆에 다음 꽃을 피운다면 꽃나무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랑은 수동적이다. 사랑처럼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건 없다.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랑하기 싫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수동적인 감정에만 휘둘리기엔 결혼생활은 너무 길다. 능동적으로 2차 꽃을 피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2차 감정의 꽃을 피우는 것, 그 감정은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일 수도 있고, 대체 불가능한 친밀감일 수도 있고, 측은 지심이나 의리일 수도 있다. 2차, 3차 꽃을 피운다면 배롱나무처럼 오랫동안 아름다운 꽃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너도 배롱나무 꽃이 되고 싶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사양하리라. 존경은 하지만 부럽지는 않은 이 마음은 뭘까. 마치 산을 보고 와 멋지다 하면서 등산은 하기 싫은 것처럼. 머리로는 수긍이 가는데 마음이 안 따른다.
각자의 삶이 있듯이 각자의 나무가 있는 거니까. 난 독립적인 아가베 아테누아타(아래 참조)가 되기로.
<픽사 베이 dark wind 님 사진>
사실 배롱나무를 처음 접한 건 이웃 작가님인 착길 작가님 브런치에서다. 몰랐던 꽃나무도 많이 알게 됐다.
https://brunch.co.kr/@nichts29/166
아가베 아테누아타에 관한 글
https://brunch.co.kr/@nichts29/280
나무 작가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