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송골 맺힌 빗방울
정확히 언제부터 병세가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니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지독하게 약한 아이였다. 특히 비가 오면 더 그랬다. 여느 아이들처럼 감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니의 부모님은 그러길 간절히 바랐다.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소견서 써드릴 테니 검사 한 번 받아보세요."
그때의 나니는 고작 4살이었다. 어린 나니라고 해서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의사 선생님과 부모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해가 지날수록 병원 방문의 횟수가 증가했다. 여름이면 집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작은 체구의 나니는 서서히 웃음을 잃어갔다. 나니가 웃음을 잃은 이유는 병이 악화되어서가 아니었다.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이 나니를 보고 더 이상 웃음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 '가짜 웃음'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이 언제 환하게 웃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5살 때였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부모님의 '진짜 웃음'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니는 그렇게 10살이 되었다. 이번 해를 맞이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었다. 선생님이었던 엄마도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의 간호에 힘을 더했다. 나니는 엄마가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무척 싫었다. 엄마는 학교에서 만큼은 학생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니는 엄마를 웃게 할 수 없었다.
"엄마, 나는 집에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엄마는 학교로 돌아가면 안 돼요?"
엄마는 또다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니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왔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일에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 엄마가 엄마의 꿈을 포기하고 나니를 선택한 것이다. 아무래도 올해부터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꿈을 포기한 것이라고 나니는 짐작할 뿐이었다.
엄마가 일을 그만두자마자 우리 가족은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 왔다. 강수량이 그나마 적은 지역으로 이사 왔다고 아빠는 말했다. 나니는 달갑지 않았다. 사람도 많지 않은 이 작은 동네에서도 더욱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나니의 집이 보였다. 큰 병원에 다니느라 도시에서 지냈을 때랑은 비교도 안되게 나니의 집은 고요하고 시끄러웠다. 방에 혼자 있는 날이 많아져 고요했고, 벌레 소리, 새소리로 시끄러웠다. 새벽녘이 되면 집이 너무 고요해서 엄마의 훌쩍이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나니는 이 집이 싫었다.
비가 오면 나니는 유리창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지켜봤다. 도대체 저 비가 뭐길래 나니와 가족들을 괴롭게 하나 원망스러웠다. 이 집이 싫었던 것처럼 나니는 비도 끔찍하게 싫었다. 비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온몸으로 나니를 감쌌다. 아빠는 차에 항상 구비해 둔 나니의 우비와 장화, 그리고 우산을 준비했다. 나니는 우비도 그냥 입을 수 없었다. 패딩처럼 두꺼운 옷을 온몸에 걸쳐 입고, 그 위에 우비를 입었다. 장화도 신발을 신은 채로 신었다. 일정과 상관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즉시 나니의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설령 그 일정이 나니의 생일 파티였어도 상관없었다.
"나 매일 숲에서 놀다 오고 싶어요."
나니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숲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이사를 온 직후, 비가 오는 날이었다. 방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비를 바라보니 어둡고 광활한 숲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매일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새들의 모습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나무의 울창한 모습도 궁금해졌다. 집 안에서의 생활이 지겨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울적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더욱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나니야, 밖에 있다가 비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러니?"
엄마는 걱정 어린 눈으로 나니를 바라봤다. 여전히 눈가가 촉촉했다. 이 집으로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엄마가 울지 않는 날은 손에 꼽았다. 매일 엄마의 눈가는 촉촉했다.
"매일 우비 입고 나갈게요. 우산도 들고요."
엄마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비만 조심할 게 아니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나니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니는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엄마와 동행하자. 너무 위험해서 그래."
나니는 머리를 좌우로 힘차게 저었다. 이건 나니의 모험이지, 엄마의 모험이 아니었다.
"아니요. 딱 한 시간만 혼자 놀고 올게요.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집 근처 숲만 맴돌 거예요.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무도, 새도, 벌레도 전부 만져보고 싶어요."
엄마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니에게 당연한 것들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부모라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부모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최악의 부모가 되었다면, 조금은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대신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 있는 거야."
"응! 다녀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