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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치의 장지혜 Sep 30. 2022

물 위를 걷듯이 줄 위를 걸어본다

가장 좋아했던 ‘황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시끄러운 뒤 운동장에서 전학생이 하얀 뭉치를 내밀었다. 

“어제 집에서 연습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 집에 이것밖에 없어서 이걸로 했더니.”

하얀 고무줄 뭉치였다. 

“오. 이거 미제 고무줄이야? 나도 한번 해 볼래.”

“아니. 이거 그냥 옷 만들 때 쓰는 바지 고무줄인데. 집에는 이거밖에 없어서.”


새하얀 고무줄이 색달라 보였다. 우리는 재미 삼아 그걸로 한번 뛰어 보았다. 역시 탄성이 달라서 원하는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우선 고무줄을 발목에 걸쳐 놓기 위한 마찰력이 부족해서 자꾸 빠져나왔다. 그리고 탄성도 부족해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검정 고무줄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고무줄은 죄다 검은색이더라.”

“그게 제일 잘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그것밖에 안 팔아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러지 말고 이 검정 고무줄 집에 가져가서 써. 집에서까지 연습하는 줄은 몰랐어.”

고수는 검정 고무줄 뭉치를 내밀며 전학생에게 말했다. 

“아냐. 사도 되는데 뭘.”

“그냥 가져가. 이게 길이 잘 들었어.”

전학생은 무슨 황금이라도 되는 양 고무줄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혀 들었다. 

“고마워. 오늘은 이걸로 집에 가서 ‘황금’ 한번 연습해 볼게.”’


 우리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이 담긴 <최영 장군>에 대한 노래를 줄여서 ‘황금’이라고 불렀다. 노래 가사가 ‘황금’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 중의 하나이다. 동작이 무난하면서도 독특하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최영장군> (나운영 작곡, 최태호 작사) 노래에 맞춘 고무줄 놀이 발 동작. 박자에 따라 동그라미 하나에 가사 한 음절씩 넣어 부르며 발 동작에 맞춰 뛴다.



줄 밟기 시작 포지션


가장 독특한 포인트는 역시 시작할 때 줄을 밟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오른발, 왼발 줄을 밟으며 점점 전진한다. 마치 물 위를 걷듯 사뿐사뿐 박자에 맞춰 발을 내딛는다. 그러다가 양 발을 땅에 딛는 순간 양 옆으로 대형이 갈라지는데 이때의 희열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뒤로 고무줄을 걸어야 할 때도 고무줄을 잘 가둬 놓으면 다리를 무릎 높이로만 올려도 돼서 편하다. 그런데 걸쳐 놨던 고무줄이 어쩌다 빠져 버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직접 돌고래처럼 뒤로 솟구쳐 줄을 낚아야 한다. 이때 유연성이 좋은 사람은 발레리나의 기교를 보여줬고 박력 있는 사람은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보여줬다. 왼발잡이 고수는 후자에 가까웠고 전학생은 전자에 가까웠다. 



뒤로 줄 걸기. 고무줄 높이에 따른 뒤로 줄 걸기의 동작의 차이.


줄을 밟고 직선으로 전진하는 첫 소절과는 다르게 8박이 지난 후 두 번째 소절에서의 전진은 그 전진마저 각자의 방향으로 지그재그로 배열된다. 처음 시작에서는 줄이 일자였기 때문이고 그다음부터는 대형에 따라 고무줄이 이미 지그재그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한 발 한발 전진할 때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마다 줄이 탄성에 의해 탁탁 빠지는데 그 느낌도 사뭇 재미있다. 


줄을 밟기 위해서는 발을 팔자 모양으로 벌려야 한다. 대게는 무릎을 오자로 벌려서 전진을 하지만 골반이 잘 열리는 사람들은 발레를 하는 듯한 포즈로 전진한다. 


노래 박자에 맞춰서 다 같이 움직일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이때 누군가가 뒤로 줄 걸기에 실패하게 되면 탈락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대형이 흐트러진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끝까지 동작을 이어 나간다. 


사실 고무줄놀이에서 낙오자란 없다. 대거 탈락을 해도 단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다음 단계에서 다시 들어갈 수 있다.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이 아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뿐이다. 실패에 의한 낙오가 아닌 다시 도약하기 위한 쉼이다. 


검고 검은 고무줄은 단순하지만 천의 얼굴을 가졌다. 부피도 거의 없어 잘 보이지도 않는데 공간을 웃음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신기한 영역을 만들어준다. 모두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고무줄을 기준으로 넘고 밟고 거는 규칙들을 만들고 지킨다. 뻥 뚫린 열린 공간이지만 모두를 하나로 품어주는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함께 여서 즐거운 놀이, 고무줄놀이이다. 





모두가 함께 여서 즐거웠던 시간들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고무줄놀이 자체를 기억하는 이가 주변에 많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이 왔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디테일들이 살아 숨 쉬는 허상이 된 것인가. 아무려면 어떠리. 함께 여서 즐거웠던 추억의 디테일들은 머릿속에 넣어두고 택배를 통해 날라 온 고무줄 묶음을 움켜쥐고 운동화를 신는다. 그 옛날 하얀 실내화였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 생각하면서. 택배 상자를 받아 들었을 때 두 손으로 고무줄 뭉치를 받아 들었던 전학생의 손이 생각났다. 과거에서 날아온 선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는 빈 배드민턴장을 향해 출발했다. 


‘검정 고무줄아, 오늘은 네가 나의 친구가 되어 주렴.’


오늘은 ‘황금’을 연습해볼 참이다. 그 옛날 뒤로도 쫙쫙 올라가던 다리가 이제는 어디까지 올라가려나. 몸이 기억하는 동작들이 몇십 년 동안 숨어 있다가도 발현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마치 자전거 타기처럼, 마치 수영처럼 한번 익히면 몸이 기억한다. 


유연성이 부족해서 높은 단계에서 줄을 놓쳐 뒤로 다리를 걸려면 점프를 같이 해줘야 한다. 태권도의 품새처럼, 발레의 몸짓처럼 하려면 오른발은 땅에 붙어 있어야 폼이 난다. 집에서라도 다리 찢기 연습을 좀 더 해줘야겠다 생각했다. 


수월했던 낮은 단계에 반해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다리를 높이 올리는 동작들이 힘들어졌다. 뒤로 올리기, 옆으로 올리기, 앞으로 올리기 동작들은 도약으로 반동을 주느냐 안 주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미 많은 단계를 거친 후라 이 쯤되면 헉헉거리느라 동작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저 놓치지 말고 걸려라라는 생각으로 다리를 휘두른다. 어찌 됐든 노래가 끝날 때 까지는 이를 악물고 시도하게 되니 ‘하나, 둘, 셋, 넷’ 카운팅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동기 부여가 되는 것 같다. 반동을 주는 점프를 하면서 유산소 운동에 포커스를 맞출 수도 있고 반동 없이 유연성에 집중하면서 점프 없이 동작의 속도를 제어하기도 한다. 점프 없이 하는 방법이 왼발잡이 고수가 했던 방식이다. 


매우 길게 뛴 것 같지만 고작 10분이다. 아직까지는 10분이면 헉헉거려 더 이상 뛸 수 없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나중에 심폐지구력이 향상되면 10분 이상도 뛸 수 있겠지 생각하며 오늘의 운동을 마쳤다. 고무줄은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하다. 이보다 더 따뜻할 수 없다. 뛰고 나면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열이 난다. 

예전에도 그랬다. 모두들 헉헉거리면서도 즐거워했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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