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나 한번 넘는다면
중학생이 된 후부터 우리들 만의 작은 변화라고 한다면 노트 필기할 때 샤프를 쓰지 않고 볼펜을 써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실수를 해도 지울 수 있는 샤프와 지울 수 없는 볼펜. 덕분에 수업시간에는 수정액 흔드는 소리로 난리가 나기도 했다. 어떤 선생님은 수정액 흔드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주 획기적인 상품인 수정 테이프가 나오기 전까지 이와 같은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수업 시간에 정성껏 필기를 하고 있는 전학생에게 고수가 전달한 쪽지가 도착했다. 수업시간에 보내는 받을 사람의 이름이 적힌 쪽지는 암묵적으로 불평 없이 안전하게 배달되곤 했다.
‘이따 뒤 운동장에서 만나. 오늘은 진짜 재미있는 거 알려 줄게.’
별 알맹이가 없는 쪽지라도 수업시간에 몰래 보내고 받으면 그 내용이 특별해지는 것 같다.
“오늘은 고무줄 기술의 꽃을 알려 줄게. 고무줄이어서 할 수 있는 고무줄 감기 기술이야.”
고수가 손에 들린 고무줄 뭉치를 풀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잘 봐봐.”
고수는 산골짝의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다람쥐>라는 곡에 맞춰 시범을 보였다.
“와 이거 정말 신기하다.”
탄성이 있는 고무줄이기에 가능한 기술은 바로 감기 기술이다. 고무줄을 다리에 감는 것인데 그때의 고무줄이 쪼임이 짜릿하다. 짜릿한 이유는 끊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심도 한몫을 한다.
전학생은 오늘도 열심히 고무줄놀이를 따라 했다. 특히나 오늘은 무척이나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이거 줄이 막 더 꼬이는 거 아냐?”
“반대로 풀면 이렇게 다리가 빠져나와. 어렵지 않아. 오늘은 한 명이 빠져서 홀수라 네가 깍두기 해라.”
<다람쥐>라는 곡에 맞추어 마치 재주넘는 다람쥐처럼 다리를 고무줄에 빙글 감고 몸도 돌린다. 어쩜 곡과 동작을 이렇게 잘 맞췄는지 모르겠다. 이 곡도 8박자 곡으로 줄을 다리 사이에 위치시킨 후 시작한다. 마치 건너편 물속에 발을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하는 식으로 움직이다 물을 첨벙 튀기듯이 고무줄이 다리에 감기도록 돌린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듯이 그렇게 뱅글 돌린다.
고무줄이 다리에 감기면 조임이 느껴지는데 피가 안 통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이거 끊어지는 거 아냐?’라는 염려가 주저하게 만든다. 혼자 할 때보다는 어려 명이서 할 때 그 쪼임이 더 강하다. 그저 고무줄의 탄성을 믿는 수밖에. 그러다가 오른발을 축으로 제자리 돌기를 한 후에 오른발을 반대 방향으로 빼어 내면 뭔가 복잡한 미로를 통과한 듯한 희열감이 있다. 사실 제자리에서 도는 행위는 고무줄의 꼬임을 더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는 행위와 도는 행위가 더해지면 왠지 모르게 더 복잡한 꼬임을 유발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발이 빠져나오는 행위는 해방이다. 이와 같이 <다람쥐>는 고무줄을 직접 다리에 감는 동작이 핵심인 노래이다. 물론 요령을 부린다고 가만히 서서 오른발만 까딱까딱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제목이 <다람쥐>이니만큼 오른발 왼발 모두 깡충깡충 뛰어 줘야 한다. 그래야 리듬을 잘 맞출 수 있고 정확한 감기 기술과 돌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뛰어야 운동이 된다.)
운동장은 쉬는 시간마다 인산인해였다. 유행처럼 모든 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고무줄놀이를 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두들 뛰어다녔다. 그래도 묵시적으로 반마다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리싸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번 다른 반에서 고무줄이 끊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다람쥐>라는 곡이었다고 했다. 고무줄놀이는 비교적 안전한 놀이이긴 하지만 끊어지게 되면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따끔하다. 그래서 주로 맨 살보다는 체육복 바지를 입었다. 체육복 바지를 교복 치마 안에 입게 되면 다리를 마음껏 휙휙 올릴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반 아이는 맨 살에 고무줄이 끊어져서 종아리가 벌겋게 부어올랐다고 한다. 반나절쯤 지나면 없어지는 자국인데 양호실까지 가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때 학교에서 고무줄놀이 금지령이 떨어질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만화책과 원카드는 보이는 족족 압수를 당했으니 말이다.
전학생은 깍두기를 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었는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무줄 감기 기술이 제 스타일 인양 너무도 잘 어울렸다. 같은 동작인데도 우리가 하는 것처럼 팔자 다리의 투박한 자세가 아닌 뭔가 우아하고 세련된 동작으로 뛰었는데 그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폴짝폴짝 뛰는데 우아하고 선이 고운 다람쥐 같았다. 사람에 따라 찰떡인 동작이 있나 보다. 전학생이 고무줄놀이의 매력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아 괜스레 뿌듯했다.
한 달 정도 된 시점에서 나만의 은밀한 고무줄놀이 운동의 중간 효과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이가 들어서 처음으로 고무줄놀이를 운동삼아 해보기로 다짐했을 때는 육중한 몸으로 인해 곡 하나를 완결하는 것도 무척 어려웠다. 단지 한 곡을 뛰었을 뿐인데 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게 진짜 운동이 되긴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렸을 때는 그 많은 곡들을 도대체 어떻게 뛴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선수들의 근육이 붙은 탄력적인 몸매가 늘 부러웠던 터였다. 누웠을 때 아메바처럼 흘러내리는 내 몸에 반해 바닥에서의 동작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닿는 면적이 최소인 듯한 기계체조 선수들의 비현실 적인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힘, 무릎을 핀 상태에서의 포인 한 발끝 뒤편으로 뒤꿈치가 족히 5센티미터는 떠있어 마치 공중 부양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긴장감, 자신감으로 가득한 당당히 펴져 있는 어깨 등 그 모습들은 ‘건강’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건강해지자. 건강해지면 사고가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했어.’
실행해보기로 한 이상 매일 조금씩 뛴 횟수와 몸의 상태를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박동 수도 부담스럽게 많이 뛰었고 뛸 때마다 몸에서 느껴지는 출렁거림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몸이 몸인지라 무리하지 않으려 상당히 노력했다. 초반에는 안 쓰던 근육을 쓰려니 온 몸이 근육통으로 시달렸다. 평상시보다는 배로 피곤해서 나도 모르는 전신질환이 생겼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발 등 근육의 근육통이 상당했는데 5분씩 뛴 것 가지고 이럴 정도면 이 비루한 몸뚱이는 분명 시늉으로 갖고 다녔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고무줄은 약해 보이지만 강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당기고 꼬아도 멀쩡한 걸 보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쇠심줄처럼 질긴 것 같기도 하지만 근본은 아주 유연하면서 탄력이 있다. 내 근육도 이와 닮았으면 좋겠다. 뭉쳐서 아픈 곳 없이 고르고 일정하게 늘어나고 또 고르게 말랑거리고 그랬으면 좋았을 뻔했다. 뛸 때마다 딱딱 소리 나는 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뛰는 뜀박질은 거의 노동 수준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한 달이 지나니 할 만해졌다. 기립근에도 힘이 생겼는지 허리에서 나는 소리도 덜해진 것 같다. 숨이 덜 차는 걸 보니 폐활량도 좋아졌나 보다. 눈으로 보이는 신체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안으로 뭔가 건강해지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재미있다. 눈에 보일만한 변화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