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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일어도 남자는 물개처럼 파도를 가르고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갔다. 남자는 조금 더 헤엄쳐가서 바다가 가슴까지 오는 것을 확인했다. 술은 좀 마셨다. 하지만 헤엄을 치지 못할 만큼 마신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배가 나오고 몸도 예전 같지 않지만 여기서부터 저기 보이는 작은 바위섬까지 헤엄쳐 갈 수 있다. 한 번 해보자. 마음을 굳히자. 지금까지 험난한 일도 겪어왔는데 이까짓 것쯤 문제 될 건 없다. 간단한 일이다. 거리는 대략 15미터 정도였다.
남자의 친구들은 경찰에게 이끌려 바다를 거의 빠져나가 해변으로 가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바다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수온이 전해지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자유형으로 천천히 팔을 저어 멀리 나갈수록 수온은 점점 따뜻해졌다. 잠시 멈추었더니 발이 바닥의 모래에 닿지 않았다. 이렇게 바다에 떠 있는 느낌이 얼마 만이었던가. 시원하게 방뇨를 했다. 소변에 체내에서 빠져나갈 때 한순간 온도가 내려가서 몸이 시원해졌다. 떨림이 있었지만 이내 바다의 따뜻한 수온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남자는 목까지 오는 찰랑찰랑한 바다의 수면을 보았다. 해안가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물이 따뜻해! 물이 뜨끈해! 마치 온천 같아!”라며 사람들은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술 때문에 체온이 올라간 자신만이 느끼는 바다의 온도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큰소리를 내며 즐거워했고 해안가에 있던 사람들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다시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경찰들은 다시 분주하게 그들을 만류했다. 멀리까지 나가지 않고 사람들은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따뜻해진 바다에서 때 아닌 온천을 즐겼다. 수온은 조금씩 더 올라가서 양반다리로 앉으면 반신욕을 하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고 바다에 앉아서 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해수욕장의 하늘 위에는 곧 비를 뿌릴 것처럼 거대한 구름이 머무르고 있었다. 구름은 어두웠지만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자줏빛의 구름을 눈치채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구름은 분명 자주색을 띠고 있었고 구름의 저편에서는 거대한 마른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바다는 마치 자연온천탕처럼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수온은 따뜻해졌다가 이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바다주위는 해무가 들어차서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해무에 흡수되어서 하나의 완전한 증기탕의 세계를 보는듯했다. 자줏빛먹구름은 실체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차례 쿠르릉하는 천둥소리를 내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데워진 바닷물 속에서 온천의 기분을 만끽했고 하늘에서는 시원한 비가 내려서 더욱 즐거운 여름밤의 해수욕을 즐겼다. 해수욕장의 밤바다에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낮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닷속에서 바다온천을 즐겼다. 그것은 매우 기이한 풍경으로 뜨거운 바닷물에서 온천을 즐긴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비상상황으로 더 늘어난 해양경찰과 해안경비대원들의 긴장 가득한 표정과는 달리 바다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즐거웠다.
해양경찰들은 떨어지는 비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비는 어쩐지 비린내를 동반하는 듯했다. 비린내는 정확하게 무슨 비린내인지 집어내기가 애매했다. 마른 복숭아에서 나는 냄새인데 기분이 나쁜 냄새 같았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큰 해수욕장의 해안경비대나 해양경찰들에 비해서 위기의식이 덜했다. 이곳 바다는 지금까지 사고사가 없었고 안전사고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이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과 난처함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목 부분에서 찰랑거리는 바다를 느끼며 헤엄쳐 들어간 50대 남자의 얼굴에 떨어지는 시원한 비의 느낌이 아주 좋았다. 남자는 배영의 형상을 취했다. 몸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느낌. 이것은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느낌과 흡사했다. 학창 시절에 종종 바다에 몸을 뜨게 해서 눈을 감고 바다를 이불 삼아 누워 있었다. 몸은 뜨거웠지만 얼굴은 시원해서 정말 온천을 즐기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재작년 일본의 야외온천에 갔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다. 왜 한국에는 온천시설과 부대시설이 일본 같지 않을까. 남자는 온천을 즐기는 일이 아주 좋은데 한국에서는 일본만큼 즐길 수 없음을 탓하며 일본온천여행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돈이 많이 들었다. 일본의 야외온천에서도 몸은 온천에 담근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 하얀 눈을 맞았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벌써 재작년의 일이었다.
그때처럼 남자는 얼굴에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면서 몸은 뜨거운 바다의 수온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이미 멀리까지 나와 버렸고 해안경찰들과 해안경비대들은 남자를 시야에서 놓쳤고 현재 바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느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해안에서는 사람들이 앉아서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헤엄을 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보니 사람들은 굉장히 작은 존재였다. 이렇게 작은 존재들이 모여서 성공과 실패를 논하고 행복과 불행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종종 바다에 와서 헤엄을 쳐야겠다. 이렇게 좋은 기분을 왜 지금에서야 알았을까. 남자의 등과 허벅지로 기포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배영자세에서 몸을 세웠다. 대중목욕탕에 가면 바닥에 기포가 나오는 탕이 있다. 그곳에 발바닥을 대면 기포가 발바닥을 때리는 느낌이 좋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