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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가 마동을 구해 준 것이다. 철탑인간에게서, 세 자루 칼의 눈도림에서, 마동이 버리고 온 자신의 수많은 과오에 대해서, 수천 마리의 괄태충의 역겨움 속에서, 목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마동을 구해 준 것이다. 마동은 자신의 꼴을 생각지도 않고 는개를 그대로 안았다. 는개는 영문도 모른 채 마동의 품에 안겨서 가쁜 숨을 기쁘게 내 쉬었다. 는개가 숨을 내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마동의 품에서 강아지처럼 움직였다. 마동의 앞에 있는 그녀는 분명한 는개였고 틀림없는 그녀였다. 작정하고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는개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는개는 다른 모습이 아닌 어김없는 그녀의 모습이었고 마동은 그녀의 부재가 가져왔던 무상과 공허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달빛보다 차가웠고 어마어마한 허전함과 쓸쓸함이었다고 마동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니힐리즘에 차츰 먹혀 들어가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자신이 되어간다고 마동은 말해주고 싶었다. 마동의 가치체계가 완연히 붕괴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 내 눈을 도려내려 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두려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동은 말할 수가 없었다. 마동은 는개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보았다.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격렬하게 원했던 얼굴이었다. 마동은 손을 들어 는개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당신, 연락이 되지 않아 점심시간에 이렇게 와봤어요. 당신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어요.”
는개의 품에 안겨 있다가 마동의 품에서 떨어져 두 팔로 마동의 팔을 잠시 잡고 마동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는개의 눈 속에 비친 세계는 마동의 마음에 투영되어 한정된 세계를 넘어섰다. 그 이상의 세계가 그녀의 눈 속에 있었다. 그 너머의 세계에는 는개의 작고도 애절한, 깊은 마음이 투영되어서 존재해 있었다. 는개의 작은 마음은 마동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세계를 알아차리자 마동의 마음은 일렁거렸다. 해일의 건조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서서히 변하듯 마동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는개의 눈을 통해 작은 마음이 와닿았다. 두 손을 모으고 뜰채처럼 뜨면 두 손에 작게 떠오를 만큼 아주 가볍고 미약한 마음이었다. 그 작은 마음은 마동에게 닿을 수 있게 마동의 마음속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제 마동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서 는개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왜 전화도 안 받았어요?”
는개는 정의할 수 없는 몇 개의 미소를 지었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는개가 거실로 올라와서 어젯밤의 상황을 눈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굴러다니는 와인 병을 치웠다.
마치 아내처럼.
“잠들어서 듣지 못한 것 같아”라고 마동이 말했다.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거북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형사에게 전화가 왔었어요. 아마 조금 있으면 당신에게 올 것 같아요. 이전에 만나서 형사가 뭐라고 그래요?”
는개는 비에 젖은 옷을 벗었다. 비를 털어냈다. 마동은 그녀에게 형사와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밖은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는개는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 바쁘게 오느라 비를 많이 맞았다. 머리가 젖었고 블라우스와 치마가 비에 젖어 있었다. 아파트 근처 어딘가에 내려서 집까지 뛰어왔다. 마동의 시선을 는개는 몸으로 받았다.
“밖에 비가 많이 와요. 회사에서 나올 때는 괜찮았는데,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해요. 어제저녁에 B블록 사거리 인슈빌딩의 상층부가 무너진 사건이 발생했어요. 알죠?”
“그래.” 마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빌딩밀집 지역이라 인근의 피해도 심각하다고 해요. 비가 많이 오니 복구도 느려지고.” 그녀가 머리를 털며 말했다. 는개가 머리를 털 때마다 기분 좋은 향이 번졌다.
“5년 전에 실종된 여자 두 명의 시체가 건물이 무너지면서 발견됐데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에요. 어쩐지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의 향을 누린내가 가득한 어두운 마동의 거실에 골고루 뿌려주었다.
“경비원도 추락사를 했다는 거 알아요? 일 년 전에 보험회사에 찾아온 여자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밤이 되도록 발견이 안 되었다가 경비원이 발견을 하고 경찰서에 연락을 했는데 죽었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을 수가 있을까.” 마동은 조용하게 말했다.
“아마도 그 경비원이 바로 연락을 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채우고 연락을 했나 봐요. 그러는 사이 아마도.”
흠.
마동은 거실의 커튼을 걷고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암울한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였다. 어두운 풍경의 어두운 하늘에 검은 구름이 잔뜩 깔려있었다. 그 사이에서 마른번개가 이질적인 밝음으로 한 번씩 번쩍거렸다. 기존의 모습보다 더 커지고 무서운 모습이었다. 지그재그로 하늘에서 바다의 어딘가로 떨어졌다. 아마도 그 밑에 서 있다가는 형태도 남지 않고 그대로 재로 변할 것만 같았다. 장군이가 말한 알 수 없는 무서운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온 것이다. 무서운 존재는 사람들을 덮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곧 공황상태에 사로잡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것이다. 오늘밤이면 그 무서운 자줏빛 해무가 인간의 세계로 완벽하게 밀고 들어올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