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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하늘보다 오늘의 하늘이 13

347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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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는개는 어느새 주방에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주방에 들어서니 어둑하고 죽어가던 거실이 환하게 살아났다. 아무래도 주방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요술쟁이의 이사벨처럼 코를 찡긋찡긋 하는 모양이었다. 는개가 만드는 음식의 냄새는 거실에 가득 들어차있던 누린내를 밀어내고 내려앉았던 그녀의 향 위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저도 점심을 먹지 못했어요. 어쩐지 입맛이 없어요. 입안이 텁텁하기도 하고…….”


는개는 냄비에 물의 양을 조절하고 냉장고에서 어떤 식재료를 꺼내서 도마 위에서 썰었다.


“죽을 만들게요. 같이 먹어요. 전 이거 먹고 가시 회사로 나가봐야 해요. 그리고 저녁에 다시 올게요”라고 는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마동은 약속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누군가와 약속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쌍방 간의 합의 하에 의해서 서로 약속을 정하고 만나고……. 약속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명령을 받거나 지시를 내려 본 적은 있었지만 약속을 정하고 약속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나갔던 기억도 별로 없었다. 약속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지금 상황에서는 판단이 더뎌지기만 했다. 약속은 지켜져야 마땅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소피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소피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이다. 소피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는개가 저녁에 다시 만나러 온다는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뛰었다.


날 만나러 다시 온다는 말에 왜 가슴이 이렇게 뛰는 걸까.


는개는 자신의 옷을 벗어서 선풍기 바람에 말리고 다시 마동의 옷장에서 면 티셔츠와 녹색의 체크무늬 반바지를 꺼내서 입었다. 비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난 후 포니테일로 묶은 채 주방에서 죽을 끓였다. 아무것도 없는 주방에서 는개는 코를 찡긋하여 요술을 부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신, 음악 좀 틀어요, 노래가 듣고 싶어요.”


마동은 는개의 말에 아이팟의 시작버튼을 눌렀다. 엠피쓰리는 반응을 하며 노래를 B&O 스피커를 통해서 토해냈다.


이제는 세상의 끝, 세상의 끝. 이미 세상이 끝나버렸어.

우리는 결국 어두워지는 하늘 밑에서 세상의 끝을 맞이하네, 맞이하네.

마동은 얼른 다른 노래로 바꾸었다. 듣다가 중간에서 꺼져 버렸는지 딱 저부분에서 노래는 다시 재생되었다. 정당한 의미를 지니고 노래는 흘러나오고 있었겠지만 마동은 ‘거울잠’이라는 밴드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당신, 우울한 노래를 좋아하는군요. 듣기 좋은데 왜 바꿔요? 그 노래가 듣고 싶어요.” 탁탁탁하며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에서 는개의 목소리도 들렸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냥 엠피쓰리의 버튼을 눌렀을 뿐이야. 다른 노래로 바꾸고 싶은데.”


는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동은 그대로 ‘세상의 끝’이라는 노래를 다시 틀었다. 노래가 수액처럼 진하게 흘렀다. 죽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새가 집안에 번졌다. 어두운 공간에 한 줄기의 빛이 떨어지듯 죽 끓이는 향이 거실로 퍼져 나왔다. 는개가 만들어내는 죽 끓이는 향은 고독하지 않았다. 익숙한 곳에서 낯설고 좋은 향이 번졌다.


“노래가 우울해요. 마치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아요.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저 무척 좋아해요.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 우리 정서와는 다른 것 같은데,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아주 잘 맞아요. 아주 넓은 세계를 향해서 교신을 하는 거 같아요(웃음). 톰 요크의 목소리는 정말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요.” 는개는 마동의 대답을 듣기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라디오헤드의 노래는 언젠가부터 노래를 통해서, 어딘가에 있는 존재에게 여기로 오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거 같지 않아요?” 그리고 는개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노래는 라디오헤드보다 더 오래됐어. 아마 30년은 되었을 거야. 그때 이런 분위기의 노래를 왜 만들었을까. 나라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가수의 내면이 그러했을까. 하며 그런 생각이 들곤 했어. 어찌 되었던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곡이야.”


마동은 는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는개도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좋아하는군. 도대체 그 녀석들 노래는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거지.”


“그건요, 노래의 느낌이 들을 때마다 달라서 그래요. 그리고 다른 노래를 들어도 느낌이 비슷해서 좋은 거예요.”


탁탁탁 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도마와 칼의 마찰이 내는 소리다. 칼은 철탑인간이 쥐고 있었던 그 칼이었다. 그녀가 들고 나서야 비로소 칼이라는 명제에 부합되는 기분이 들었다. 죽에 넣을 재료를 썰고 있는 모양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죽에 들어갈 만한 그 무엇도 없을 텐데, 하고 마동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술 쟁이니까. 코를 찡긋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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