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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어제는 세상의 끝, 세상의 끝, 이미 세상은 끝나 버렸어.
우리는 결국 모두 무너지고 마네. 무너지고 마네.
“왜 이 노래만 계속 나오는 거지……”라고 마동이 혼잣말을 했다.
“비 오는 날에 잘 어울려요. 좋으면 계속 들으면 돼요”라고 는개가 말했다.
“그래, 계속 들어.”
“그래요, 계속 들어요.” 는개가 웃었다. 바람의 저 끝에서 불어오는 웃음이었다. 흉내 낼 수도 없고 다시 볼 수도 없을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자아낼 수 있는 웃음이었다. 는개의 웃음은 쌓여있던 어둠의 찌꺼기를 쓸어버리는 마력이 있었다.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면 시간이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는개의 웃음을 계속 보고 있으면 세계는 전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는개의 미소는 사고의 재생력을 점점 뒤로 후퇴시켰다. 는개의 웃음 속에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견고한 관능도 함께 있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는개의 또 다른 모습일까. 그녀가 떠나고 나면 난 그녀의 웃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지금 그녀의, 는개만의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동은 만족하리라 다짐했다. 는개의 부재가 몰고 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허함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마동의 옆에는 그녀가 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이것은 실체였고 실재다.
그래, 그러면 다행인 거야.
마동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작은 손을 잡았다. 작았다. 너무 작아서 꽉 쥐면 부스러질 것 같았다. 는개의 마음과 비슷했다. 강인하게만 보였던 는개의 손은 너무 연약하고 부드러웠다. 는개도 마동의 손을 쥐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은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손바닥의 마찰은 두 사람의 근원적 순수를 나눠가졌다. 는개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동안 기시감이 들었다. 마동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 는개의 손을 이렇게 꼭 쥐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늘어진 안개처럼 굉장히 미미하고 작은 그녀의 손을 놓칠세라 쥐고 어딘가를 향해서 걸어가던 기억이 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저 끝으로 우리는 걸어가고 있었다. 빛이라고 하는 것이 원해 그렇게 작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멀리 있어서 빛이 작게 보이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 느린 걸음걸이로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앞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작았고 부드러웠다. 분명 희미하지만 기억이 났다. 걸어가는 동안 포르말린 냄새가 곳곳에 있었다. 냄새도 기억이 났다. 허용의 한계를 넘어선 냄새. 오롯이 그 하나의 냄새가 났다.
벌어진 살갗 사이로 피와 진물이 흐르는 냄새가 나던 곳.
알코올에 적시 솜이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냄새가 나던 곳.
고통에 허덕이다 결국 절망적인 침묵의 냄새가 나던 곳.
포르말린 냄새가 기억이 났다. 오래된 복도의 바닥과 오래된 병원용 침대가 보였고 오래된 형광등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볼 틈도 없이 느린 걸음으로 통로의 저 끝으로 손을 잡고 걸어갔다. 작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오로지 저 앞의 빛을 향해서 걸어갔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딘가에 살포시 서로 누웠다. 조용한 하루였다. 침묵이 겹겹이 내려앉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빛을 내리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들꽃의 향이 우리를 간질이고 치누크가 불어와 우리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저녁노을의 그림자처럼 은은한 빛을 받으며 나는 영혼이 그 빛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을 알았다. 짧지만 강인한 한순간의 풍경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아픈 마음을 지닌 그녀의 미소를.
그녀만의 슬픈 미소를.
마동은 는개의 손을 쥔 채 눈을 떴다. 는개의 손은 이전보다 강렬하고 맹렬한 그 무엇을 마동의 손을 통해 마동에게 전달해 주었다. 마동은 자신이 그동안 희미하게 꿈에서 봐왔던 전경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희미한 모습의 그녀가 는개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는개는 마동보다 나이도 어렸다. 어린 그녀는 마동과 사는 것도 달랐고 시간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마동은 그동안 는개를 만났다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과 교접하기 전까지는.
어째서 는개의 손을 잡는 순간 마동의 희미한 꿈속의 전경이 탁 트였던 것일까. 시간이 왜곡되고 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두 사람은 만났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 마동은 어린 자신이 왜 병원으로 갔는지, 는개는 왜 병원으로 와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시간이라는 흐름을 생략하고 손을 잡고 만났었고 현재 같이 있었다. 지금 는개를 안고 있는 현재가 소중했다. 는개의 작은 손을 이렇게 꼭 쥐고 있는 지금이 마동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동은 의식과 무의식을 총 동원해 지금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이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