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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12. 2024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15

소설


15.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세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내 방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안은 그녀의 비누향이 아직까지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안에 머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오른손을 보았다. 세 시간 전에 나는 내 오른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만졌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동시에 과거가 되어 버렸다. 선명한 아침햇살을 받은 기억이 금세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을 만졌던 현실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두두둑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하늘에서 비가 막힘없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비가 된다면 선배와는 무관하게 그녀가 있는 곳에 그대로 떨어질 수 있을 텐데. 그녀의 모습을 딱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 흩어져도 좋을 것이다. 하늘은 슬픈 일이 있어서 크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땅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연한 사실인데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방안의 작은 창을 조금 열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기말고사가 끝이 나면 자취촌은 고요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학생들만 몇몇 남아서 냉기 어린 자취촌을 지킬 것이다.


 집으로 가지 않는 사람 중에는 선배도 속했다. 방학 때에도 언제나 바빴고 자신의 식사는 자신이 해 먹었다. 선배는 어쩐지 집과는 왕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는 자신의 집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건 나와 같았다. 나 역시 우리 집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승섭이 빼고.


 선배는 방학이라고 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처럼 와아 하며 신나게 집으로 가서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편안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무위도식하는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될 가망성이 많다고 했다. 선배는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방안의 카세트를 틀었다. 카세트의 촘촘한 스피커의 틈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로저 워터스에서 데이빗 길무어로 바뀐 핑크 플로이드가 ‘디비전 빌’을 연주하고 있다. 이지러진 세계로 이끄는 음악이었다. 그런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계다. 이 세계에는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도 존재한다. 열린 창문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비를 손바닥에 받았다.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차갑고 슬펐다. 손바닥에 닿은 비도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곧 떨어져 없어질 거라는 슬픔.


 하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씩의 아픔을 거둬들였다가 다시 비로 환생해 땅 위로 내려앉아 세상을 촉촉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비의 삶은 너무나 슬프다. 계절의 끝에 쏟아지는 비는 더욱 차갑고 몹시 슬프다.


 학교생활은 똑같았다. 비슷하게 흘러갔다.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생활은 단순하게 반복될 뿐이다. 누구나 일탈의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이 길어지면 일상의 편안함을 그리워한다. 수업이 끝나면 모임이나 학과의 참견을 뒤로하고 빠르게 자취방으로 와서 침대에 누워서 그녀를 생각했고 오른손을 펼쳐 보았다. 그러다가 선배에게 두들겨 끌려가서 밥을 먹었고 선배의 방에서 선배가 하는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들었다. 선배 옆에는 그녀가 늘 있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각각 자신의 자취방에서 밥과 반찬을 들고 왔다. 늘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포틀럭의 모습이 되었다. 게 중에는 얼굴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다른 과에서 선배의 방으로 온 사람이었다. 아마 이 자취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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