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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Mar 25. 2024

내가 가장 평안할 때(12)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죄 고통이 보일 때 자유해진다

본글은 10화 [연재 8] 조언/배려/자기 책망/표현의 자유 사수의 서두글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내면의 고통에서 자유해진 사람들 혹은 무디어진 사람들에게선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들이 오랜 고난을 통해 터득한 진리는 무엇일까? 대학생 때 몸 담았던 공동체의 멘토나 선배들이 그랬다.  


겸손. 그분들 자유의 뿌리엔 어김없이 이 부드러운 마음이 있었다. 겸손은 흉내내기도 어렵지만 삶으로 체화해서 살아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들은 보통 조금이라도 억울하다 싶으면 분노가 올라오고, 조금이라도 손해 봤다 싶으면 밤잠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엄연히 나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가족이나 타자들 사이에서조차 그간 가장된 겸손은 여지없이 발각 나곤 한다. 감정에 균열이 일어나고 심지어 쓴 뿌리는 공격성으로 돌변한다. 마음 심연에서 떠오르는 한 단어 '감히'는 겸손이라 믿었던 지점들이 실은 덧칠해진 교만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엄마가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셨어?"

"아내가 감히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친구가 감히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상사가 감히 나를 지적했어?"

"옆집 엄마가 감히 내 흉을 봤어?"

"도로 경찰이 감히 내게 위반딱지를 뗐어?"


겸손은 그 말이 옳으면 겸허히 수용하고 틀리면 잠잠히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무엇보다 겸손은 자기 상처와 고통에 함몰되어 치닫던 방어성 공격 아니 보복성 공격에 제동을 걸어준다. 그래 가족과 지인, 타인에게 더 큰 상처와 손해, 억측을 끼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게 도와준다. 혹여 내가 불가피하게 충고나 조언 때론 책망을 해야 할 때라도 미움과 분노, 원망이 아니라 어그러진 길에서 건져내기 위한 목자의 심정으로 하며 근본 따뜻한 온유가 있다.


혹여 요즘 누군가에게 분개하느라 잠 못 드는가? 나도 동일한 말과 행동을 누군가에겐 했던 사람임을 절감할 때, 그 열감은 금세 부끄러움으로 냉각된다.


위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범죄자들의 내면을 허구로 각색해 본 것이다. 프로파일러들이 극악한 범죄자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공통점은 극도의 ‘피해의식’이라고 한다. 의외이지 않는가? 누구보다 세상에 극악한 피해를 끼친 가해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울부짖으니 말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이 갖는 이 피해의식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심지어 살인하고 어떤 이들은 연쇄살인을 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게 해준다. 그들에겐 일종의 면죄부, 기괴한 방어기제가 된다. 범죄자들은 이 ‘피해의식’이라는 자기 매몰에 빠져 자신을 또 세상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늘 나는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늘 주변 사람들이 또 환경이 문제였다는 생각에 더 깊이 침잠한다. 동시에 세상을 모두 처벌해야 할 적으로 둔갑시킨다.     

세상에는 천인공노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각종 범죄자들이 있다. 이들은 공권력이나 종교의 힘, 누구의 도움으로도 쉬 회생되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극단적인 예는 별 외로 하더라도, 사실 아주 평범한 우리들도 피해의식에 매몰되어 살 때가 많다. 자신을 잘 살펴보라.

ㅡ 중략 ㅡ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상처로 인한 죄'를 '가시'로 치환해서 표현한다)
그러나 보통 이런 극단적인 일들은 주변에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상당히 일상적인 일들에서 소란해지고 무너진다. 남편이 무심히 던진 말, 아내의 투덜거리는 신세 한탄, 직장 동료가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와 그 눈빛, 학교에서 친구가 저지른 작은 실수나 험담, 부모님의 다툼, 버스기사의 질책, 떡볶이집 아주머니의 무반응, 동생의 뺀질함. 때론 내가 알던 학교동창의 잘난 남편, 소꿉친구의 성공, 옆집의 아파트 당첨 소식,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짝꿍, 친구 아들의 서울대 합격소식, 내 성적표의 C학점 등. 우리 마음에 가시(죄)가 생기되는 통로는 생각보다 서서히 굉장히 일상적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의식하기가 어렵다. 그 가시 때문에 내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는 것을, 또 그 가시를 빨리 빼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절대자께서 인간의 눈에 확연히 보이는 '숙제'를 그 인생에 던져 주시는 게 아닐까? 가령 내 개인의 삶에 자꾸 장애물과 큰 아픔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질병이나 사고, 사건, 인간관계 등 다양하다. 내 마음의 작은 가시(죄)를 무심히 방치하며 가시를 키우다 결국 그 가시에 찔러 넘어질까 봐 도우시는 손길이 아닐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에 대해 C.S 루이스는 "고통은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는 확성기입니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이 대목을 더 과격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고통이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우리네 인생이 가시에서 자라난 대못에 박혀 박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메가폰 말이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졌던 핵심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늘 나만 상처받고 억울하고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 피해의식 때문에, 사춘기시절엔 어머니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동생에게는 투명스럽게 대하고, 영문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지냈다. 물론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서 가족 외 타인에게 쏟는 일은 거이 없어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학교 들어가면서, 내가 피해의식에 과몰입되어 자신을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놓고 있었음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죄 그리고 죄의식, 죄책감에 대해서 할 말이 길다. 그것을 기술하려면 A4 1000장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오늘은 그 첫 단추인 “나도 가해자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는 시각의 전환만을 전하고 싶다. 나의 아픔에만 매몰되던 데서 세상과 타인의 아픔들이 들리고 읽힐 때, 그때 인간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때 진정한 진리와 자유가 내 삶을 채워갈 여백이 생기기 시작한다.        

출처:청년 클레어의 < 자기 매몰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 중에서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

최근 20대 중반의 여자 조카애가 진로 문제로 예민해져 훌쩍인 적이 있었다. 피해의식과 원망 심지어 분노의 감정도 보였다.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때 내가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으로 내 어린 시절을 상처로 망가뜨렸고, 나중엔 생활비도 전혀 갖다 주지 않았던 내 아버지 곧 조카의 친할아버지를 용납했던 과정을 나누었다. 타인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할 때, 나의 고통에서 해방이 되더라, 그런 말을 해주었다. 


가난은 내게도 많은 상처와 슬픔, 우회의 지난한 길을 남겨 주었다. 허나 내가 대놓고 가난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 아니 못 했던 이유가 있다. 내겐 어머니의 고통이 더 크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힘들지만 어머니는 무너지듯 더 버겁게 힘들겠다 자주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 또 최근엔, 내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니 한없이 가엾다 생각됐다. 급속한 산업화의 희생양으로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중력과 가속도에 질질 끌려, 그렇게 도시 변두리에서 막노동으로 매일을 살아내야 했던 한 남자, 내 아버지. 그 한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몰두하니 어느덧 아버지가 용서되고 용납되었다.


타인도 자기 죄로 고통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지은 죄든 모르고 지은 죄든, 실책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포함해 여러 고통을 남긴다. 그리고 이런 고통은 나에게 위해를 입힌 사람들도 겪고 있다는 사실, 이것을 알 때 세상을 보는 너른 눈이 열린다. 죄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하는 타인, 이 앞에서 인간은, 거울처럼 그들에게서 나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본글은 브런치 해커? 사라진 글 수색 중 에서 언급했던 그 <사라진 글>입니다. 다시 새로 쓰자니 전반부는 아예 내용이 새로워진 것 같은데요. 아래 묵상글은 그때와 동일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감사해요 :)


#아래는 타인도 죄로 고통한다는 것을 알 때, 삶이 좀 더 자유해짐을 알게 해 준 큐티입니다.




[생생큐티] 2024년 3월 15일(금) 잃어버린 양 한 마리(누가복음 15장)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사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1~7)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세리는 오늘날로 치면 세무공무원으로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직업은 당시엔 시대의 풍운을 겪으며,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우리나라의 일제치하 40년과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세리는 로마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권리를 얻는데, 이때 폭리를 취해 로마에 일부 주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즉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혈세를 쥐어짜는 고리대금업자와 같았고 속박국 로마에 아부하는 매국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식 죄인으로 낙인찍혀 출교를 당했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헌금을 내려 해도 돈이 더럽다 하여, 그 돈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왕따 중에 왕따, 세리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죄패, 1급 죄수라 낙인 찍혀 살아갔습니다.


세리와 더불어 또 다른 대표적인 죄인이 바로 ‘창기’입니다. 요즘 말로 하며 매춘하는 여자들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이런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사회에 암적인 존재로 치부되며 내놓고 사회생활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 곧 성민(聖民) 임을 자부했습니다. 일반적인 나라나 조직에서 요구하는 도덕률이나 윤리의식 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종교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선, 예수님께서 이 세리와 창기 곧 세리와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됩니다. 때로 이것은 의도성을 지닌 듯 성경 곳곳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세리와 창기는 종종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빗대어 비교되곤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오늘날 치면 성직자, 신학교수, 포괄적으론 독실한 기독교인 등 사회에서 덕망 높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경분리가 되지 않았기에, 이들 종교지도자는 국가 내 전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사회 지도층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나름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인용하고 가르치는 ‘예수’란 듣보잡 30대 초반의 신출내기의 등판은 가히 눈엣 가시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파격이었습니다. 기성 사회체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유려하고 안정되게 닦아놓은 종교체계를 과격하게 도전하는 행보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자신들이 아예 출교 시켜 격리시킨 이 세리와 창기를 영접하고 심지어 식사까지 감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그들을 쳐내지 못하는 것이야 매너상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겸상해서 식사한다는 것은, 부득이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교제였습니다. 즉 세리와 창기를 출교 한 자신들을 우회적으로 저격하는 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날, 평소 이것을 못마땅해 여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영접한 그들 곧 사회악의 근원인 그들이 대낮에 활보하고 심지어 자기들과 같은 공간에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대담함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자기들끼리 이런 예수님의 사역방식을 수군대며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마침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알고 있었고, 언제가 한 번은 짚어주고 싶었던 주제이기에, 이날 날 잡은 듯 왜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을 유대교 전통대로 격리시켜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하는지, 심지어 금기시 는 식사까지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회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죄가 없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죄인인 것은 예수님도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여전한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 곧 죄를 돌이키고 변화된 삶을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관계성’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들을 정죄하는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또는 사회규범이 남겨준 ‘주홍글씨’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격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인 채로  ‘먼저 친밀히 교제’를 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돕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죄를 미워하므로 세리와 창기를 격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을 용납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사랑하지 않기에 그들을 기다리고 견디기도 어렵습니다. 아니 복수를 모의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죄로 병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아픈 것. 그것이 죄와 허물이 많은 세리와 창기를 향한 사랑에 기초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너희도.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거짓과 위선은 도리어 세리와 창기보다 더 더럽고 역겨운데도,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회개하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만 두둔하고 그들을 변호하므로 보호해 주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그들처럼 죄인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동일한 시선으로 긍휼히 보고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타인의 죄와 허물이 쉬 용납되지 않고 용서되지 않는 것, 이 고통이 인생 고통의 과반수는 넘을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 일지로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해갈시켜 주는 한 지점을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내가 용서하기 어려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하나님과 예수님도 우리를 힘겹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나의 죄 됨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며 장본인인 것을 아는 것, 것이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쇠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날 때, 구원과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타인을 향한 용서와 용납도 이때에야 진정으로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아래서, 죄인으로 자기 인식과 발견을 날마다 묵상하고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동시에 그렇기에 다른 죄인인 사람들의 인생을 ‘사랑’에 기초해서 볼 수 있는 마음을 날마다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한 마리 잃은 양 같던 저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영광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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