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맹욱 Jul 24. 2023

악당이 되는 데에는 영웅이 되는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얼마나 닮았는가」 - 김보영

「"사람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

 얼마나 닮았는가 - 김보영 


 내가 대학교를 다닐 무렵에, 우리 학교 근처에서 신천지들이 출몰했던 적이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더위가 찾아오고 뼈가 시린 겨울이 되어도 그들은 비슷한 옷차림과 가방, 그리고 특유의 초점 없는 눈을 들이밀며 관상이 좋다거나, 좋은 기운을 풍기고 있다는 말로 나에게 접근하곤 했었다. 한 때는 좋은 말로는 잘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조상님이 뒤에 서 있다는 말이나, "자네 장남이지?", "자네 최근에 힘든 일 있지?" 같은 때려 맞추는 방법을 사용해서 말을 걸기도 했었다. 


 초반에는 소설에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서 얘기를 들어주곤 했는데 시작은 창대하나 왜 매번 끝은 같은지. 괜찮으시다면 카페에 가서 얘기를, 복채를 내시게 되면 같은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곤 했다. 그 뒤로는 그냥 뭐라고 말을 걸든 간에 무시하며 지나가곤 했었는데, 최근에 한 여자는 눈을 반짝 거리며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영웅이 될 관상이세요."


 그 말을 듣고 그녀에게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21세기에 영웅이라니. 춘추전국시대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도 아니었고, 여기가 마블 세계관도 아닐 텐데. 내가 영웅이 될 관상이라니. 물론 그런 영웅이라는 존재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만큼 극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웅이 될 관상이라는 말이 너무 웃기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초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용기나 정의감이 투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머릿속에서 "영웅"이라는 두 글자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다. 신천지의 말을 믿었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진짜 "영웅"이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웅. 히어로. 같은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아이언 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그리고 스파이더맨 같은 존재들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힘이든 센스든, 아니면 재력이든 간에 그들은 그 방면에서 전문가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능력을 가지고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거나 재난을 막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도 있고, 건물이 무너지거나 사람들의 집이 사라질 때도 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아끼는 한정판 굿즈라던지 LP와 같은 제품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악을 물리친 히어로들을 향해서 일부의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역시 아이언맨이야."


 "역시 우리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하지만 과연 이렇게 좋은 여론만 존재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자신의 부인이나 남편이 죽고 나서야 이 장소에 도착했는지, 왜 본인의 집을 향해 악당을 날려버렸는지, 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파괴된 이후에 나타나서 악당을 물리친 건지. 그리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저 악을 처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좋아해야만 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히어로는 많은 사랑을 받는 대신 많은 미움도 함께 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건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히어로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커다란 괴수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을 찾고 있고, 그들이 시간 내에 나오지 않으면 마을을 부숴버리겠다고 경고한다. 당신의 아파트에서는 얼른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바깥세상은 아비규환이 돼버린다. 당신은 급한 대로 물건을 챙겨보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괴수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집을 버린 채 바깥으로 달아나버린다. 대출이 2억 정도 남은 아파트. 곧 아파트 값이 오른다는 얘기까지 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집을 버리고 달아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사실 그냥 집과 함께 같이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결국 아파트는 괴수의 손에 부서져버린다. 당신이 지금까지 모았던 모든 돈과 회사의 중요한 서류들. 당신의 취미.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등. 아, 저런. 괴수가 당신의 집을 향해 불까지 뿜어버렸다. 이제 잔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괴수는 천천히 당신을 향해 다가온다.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눈앞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그는 당신의 친절한 이웃답게 걱정마라는 말을 내뱉으며 괴수를 물리쳐버린다. 물론 그 괴수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은행 몇 개와 커다란 빌딩이 무너진 것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아무튼 스파이더맨은 차갑게 식어버린 괴수의 시체 위에서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당신 역시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보통의 영화는 이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며 끝이 난다. 하지만 당신의 삶은 이 장면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집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에게는 매우 슬프고도 기나긴 에필로그가 남아있는 셈이다. 당신의 삶은 히어로에게서 구출되었지만, 그것이 당신의 삶을 구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에게 남은 건 차갑게 식어버린 현실뿐이다. 대출이 있던 집은 통째로 날아가버리고,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 출근은 가능한지, 내가 돈을 맡겼던 은행은 무사한지. 당신은 괴수와 마주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당신은 임시 피난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당신처럼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당신도 그들 사이에 껴서 밥을 먹고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 잠드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꿈속에서는 어김없이 괴수가 튀어나와서 당신의 집을 부순다. 그리고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다가올 때 어김없이 당신의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괜찮을 것이라고. 그 꿈은 며칠,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반복된다. 그리고 그동안 당신의 삶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목적 없고 공허한 분노가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갈 때쯤.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내 집이 부서지고, 내가 불행해졌을 때만 히어로가 나타나는 걸까. 히어로라 함은 내가 불행해지기 전에 나타나서 도와줘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닌가 하고. 당신은 히어로에 관한 분노가 극에 달하고, 여느 빌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복수를 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결국 영웅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정확하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웅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누군가는 부모님, 친구, 연인, 그리고 스쳐가는 인연이 모두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영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악당 역시 마찬가지다.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면 그대로 빌런이 돼버린다. 영웅과 악당. 그들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히어로든 악당이든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매번 영웅과 악당이라는 기로에 서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데에는 커다란 뭔가가 아니라 정말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악당이 된다.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간단한 일이다. 달리는 차에 들어가 운전석에서 운전사를 슬쩍 밖으로 밀어내면 운전사는 영문도 모르고 뒤에서 달려오던 차에 깔릴 거고 연쇄 추돌사고를 일으키겠지. 사무실에서 사람을 들어다 창틀에 얹어 놓기만 해도, 지하철 어디나 폭탄을 놓고 나온 들 누가 제지할까. 단순히 칼로 쑤시고 다니기만 해도. 하지만 악당이 되는 데에는 영웅이 되는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을 부술 배짱 이전에 제 삶을 부술 배짱이 필요하다. 제 아이의 삶을 부술 배짱까지도.」

얼마나 닮았는가 - 김보영
이전 11화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