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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ug 23. 2024

정신병자 김명제 그리고 이정남

저마다의 아픔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공허하게 앉아 천장만 바라보던 나는 병원에서 유일하게 말을 섞는 사람이라곤 정남뿐이었다. 그는 대답 한번 시원하게 한 적 없는 내게 굴하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게 다가왔다. 그는 최순임 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게 병원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간호사가 친절하고, 어떤 보호사가 까칠한지. 병원에서 따분할 땐 어떻게 시간을 보내면 좋은지, 다른 병실엔 어떤 환자들이 있고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정남은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큰 키에 단정한 외모. 막힘없는 말솜씨. 정남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래도 꽤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나 또한 이곳에 오리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낮까지만 해도 멀쩡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떠들어대던 정남이 저녁 소등시간이 되자 갑자기 미처 날뛰었다. 여태 잘만 누워있던 침대를 걷어차고, 욕을 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정남의 발작에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얼이 빠진 나를 뒤로 다른 환자들이 간호사를 호출했다. 다급하게 달려온 간호사와 보호사는 정남의 양팔을 제압하며 그를 말리고, 병실 밖으로 그를 끄집어냈다.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남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엉망이 된 정남의 침대를 정리하며 그를 기다렸지만, 정남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기척도 없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방금 전까지 울부짖던 정남을 떠올렸다. 그의 표정은 얼마 전 공장에서 난동을 부리던 나의 표정과 비슷했다.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말들. 정남에겐 무슨 사정이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이토록 그를 미치게 만들었을까.


  다음 날, 아침에도 정남을 보지 못했다. 병실 안팎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몇 시간이 지났다. 점심식사를 한 뒤 약을 먹고 병실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정남이 돌아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그림 수업을 다녀왔다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검정 크레파스와 빨간 크레파스로 범벅이 된 침대.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침대, 인가요?” 내 질문에 그는 고개만 살짝 끄덕인 후 침묵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이내 정남은 입을 열었다.


  “저는 침대를 싫어해요. 아내가 저희 신혼집 안방에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는 모습을 목격했거든요. 그 침대 위에는 18개월 된 제 딸아이가 함께 누워있었어요.” “아.” 나의 짧은 탄식에 정남은 오히려 내게 웃어 보인다. “그 뒤로 침대가 무서워요. 어느 날은 바퀴벌레 떼가 우글우글해 보이고, 어떤 날은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아요.” 정남의 이야기에 나는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항상 웃고 있던 그를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쉽게 생각했던 지난 나의 생각과 마음을 반성하고 있는 사이 정남은 나의 맘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남들은 공감 못해도 다 저마다의 아픔이 있으니까요.”


  저마다의 아픔. 나는 정남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내팽개친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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