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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Oct 07. 2024

나는 당신이 권태롭다.

미안해요, 당신과 나의 사랑은 오늘까지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당신을 내 삶에서 밀어내고 싶다


내가 살던 공간으로 당신이 들어온 지 딱 이 년이 지났다. 730일. 이 시간 동안 내 사랑은 수 십, 수백 번 변했다. 영원을 꿈꾸던 그 마음이, 이 년 만에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얼마나 뜨겁게 불타버렸는지. 


아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당신. 나는 꽃처럼 해사한 당신의 미소에 매혹되었다. 나는 종종 당신에게 카라라든지 안개꽃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순백의 미를 뽐내는 것이 당신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순진함을 사랑했다. 나는 여느 사랑에 빠진 이가 그러하듯이 밤새 당신과 통화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하루의 시작과 끝을 당신과 함께하는 것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가는 마음을 ‘사랑’이란 두 글자에 모두 다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해하기도 했다. 내게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그저 축복이었다. 당신이 있는 삶이 감사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변했다. 더 이상 당신이 웃는 것을 봐도 사랑스럽지 않다. 입을 활짝 벌리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웃는 당신을 보고, ‘입 좀 가리지’라는 생각을 한다. 당신이 좋아하던 식당도 주차가 어렵다는 이유로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닮고 싶었던 당신의 취향은 이제 내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 정말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잠이 든 당신을 보고도 포근하게 안아줄 마음도, 손을 꼭 쥐어줄 마음도 들지 않는 것을 보면. 


권태(倦怠),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권태가 무서운 이유는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언제부터 당신에게 싫증을 느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며칠 전 당신은 쉬고 싶어 하는 나를 이끌고 집 앞 카페로 향했다.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표정에도, 이야기에도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빛나는 당신의 눈빛에 마치 눈이 부신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 집에 가서 게으르게 잠이나 청하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당신이 없는 조용한 집에. 속으로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더 이상 휴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쯤, 당신이 테이블을 두드린다. “내 말 듣고 있어? 무슨 생각해? 요즘 왜 이렇게 대화하기가 힘들어?”


대화? 지금 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여태 삼십 분이 넘도록 대화하지 않았냐고 짜증을 내는 내게, 당신은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속에 쌓아두었던 말을 꺼낸다. 


“요즘 우리가 대화를 했다고? 그건 그냥 말이야. 갔다 올게, 돌아왔어. 밥 먹자. 자자. 그냥 인사뿐인걸. 우리가 전처럼 서로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해하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 나누기나 해? 당신은 우리가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 적이나 있어?”


아. 숨기고 싶었던 내 진심을 꽤나 자세하게 들켰다. 진심으로 당신을 궁금해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당신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 발만 걸쳤던 내 마음이 결국 탄로가 났다. 나는 당신이 권태롭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이런 내 마음을 더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아직 혼란스러웠다. 당신에게 일시적인 싫증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당신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 밖 타인이 되어버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당신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린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달렸다. 아, 제발 울지 마.


그날, 나는 우리 관계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애써 힘을 들여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감정들이 일시적으로, 조용히 왔다 가기를 바랄 뿐.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이 권태라는 감정은 곧 나를 잠식해 버렸다. 놀랍게도 나 스스로 마음을 인정해 버렸던 순간부터 당신이 더욱 싫어지기 시작했다. 굳어버린 내 마음에 날마다 당신의 눈물이 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당신이 애처롭긴커녕, 당신을 견뎌내야 하는 일처럼 여겼다. 어깨가 축 처진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도망치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게 당신은 내 마음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렇게 변한 나를 알면서도 붙잡고 사는 당신이 답답하고 숨 막혔다. 나는 당신의 일이 항상 바빴으면, 어디론가 며칠 씩 출장이라도 떠났으면. 그것도 어렵다면 친구들과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될 수 있는 한 아주 늦게 집에 돌아오길 바랐다. 아니 집에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멀리 떠나버리길 바랐다. 나는 이미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잃었다. 


우리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나 때문인데, 마치 당신이 죄인이 된 것처럼 굴었다. 내 눈치를 보고, 내 기분을 살폈다. 그런 당신이 잠시 안쓰럽다가도,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떠나 달라고 빌고 싶었다. 


지난밤, 당신이 친구와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 이 관계를 놓지 않겠다고 마치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당신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당신이 왜 싫어진 것일까. 순수하고 아름답던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는데. 우리의 시간을 되돌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변명 거리가 될 만한 일도 없었다. 모든 게 예전과 같았다. 퇴색되어 버린 내 마음만 빼면. 


통화를 마친 당신이 침대로 돌아와 등을 돌리고 눕는다. 그리고 이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들썩이는 당신의 등 뒤로 나는 어떠한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조용히 흔들리는 어깨를 보며 이별을 결심했을 뿐. 아마 나는 이별을 고한 후 나는 머지않아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한 때 내 목숨을 다 바쳐 사랑했던 당신을 더 이상 이대로 내 곁에 둘 수 없다. 헤어질 때가 되었다. 내 마음이라도 알아챈 양 당신의 등이 더 크게 들썩인다. 당신당신과 내 사랑은 오늘 밤까지야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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