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이별을 선택했다.
어떤 사랑은 마침표를 찍는 순간, 눈물보다는 한숨이 나온다. 지수와 영호의 사랑이 그랬다.
그들은 서로를 처음 본 순간,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계절이 같다는 이유로, 커피 취향이 비슷하다는 작고 작은 이유로 그들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금세 사랑을 키우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닮아, 필시 하늘에서 내려준 인연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남부럽지 않게 서로를 아끼며 마음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함께 축복해 준 지 반년쯤 지났을까. 한창 영호에게 빠져있을 지수로부터 밤늦은 전화가 왔다. 지수는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전하다가, 영호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끔 말이야. 내가 영호를 너무 사랑하는 것이 조금 무서워.” “그게 무슨 소리야?”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들어다. 으레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두 사람의 사랑이 엄청 대단하다는 정도의 행복한 고민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반응이 미지근해 보이자 지수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영호랑 밥을 먹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고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영호는 편식이 꽤나 심하거든. 그렇다 보니 밥 먹을 땐 항상 그가 메뉴를 골라. 너는 알지? 내가 얼마나 버섯요리를 좋아하는지. 근데 영호는 버섯 향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대. 생각해 보니 영호한테 맞추느라 내가 좋아하던 식당을 안 간 지도 오래됐어. 전엔 이런 게 다 괜찮았는데 요즘은 가끔... 나도 내가 좋아하는 걸 편히 먹고, 하고 싶어.”
지수의 이야기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혼의 단짝이라도 만난 것처럼 잘 맞는다는 두 사람에게 이런 고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지수의 말에 벙찐 나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잠시 침묵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한참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지수는 이야기했다. 영호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낌없이 베풀고, 양보하다 보니 어느덧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영호만 남은 기분이라고. 자신의 단단했던 요새가 무너지고, 영호의 성만이 남은 것 같다고. 그리고 끝내 영호를 벗어나 가끔 본래의 자신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며 지수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지수와의 전화는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끝이 났다. 그녀의 마음을 두고 내가 그녀를 탓하거나, 다시 잘해보라고 달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긴 시간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봤다. 영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이힐을 신기 시작한 건 자신의 선택이었는데, 이제는 꼭 하이힐을 신어야만 영호가 예쁘다고 하는 것 같아서 발이 퉁퉁 붓고, 까져도 매일 하이힐을 신게 된다는 그녀의 한마디. 나는 그 한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사랑은 때때로 나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지수가 그러했듯이 내게 전부가 되어버린 상대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베풀고 싶어 진다. 본디 그렇게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사랑의 힘이지 않은가.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잃고 상대에게만 매달리는 사랑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오래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수와 통화를 마친 뒤, 다시 몇 달이 흘렀다. 오랜만에 만난 지수의 한쪽 손에는 영호와 나누었던 반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내 눈길을 알아차린 지수가 멋쩍게 웃어 보이며 영호와의 이별 소식을 전한다. 그녀는 영호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변한 것을 느끼자 꽤나 자책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전화를 마친 그 뒤로도 얼마 동안 영호가 좋아하는 하이힐을 신고, 영호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그가 고른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하지만 그녀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주말, 그녀는 영호에게 선약이 있다는 거짓말을 한 후, 자신이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식당을 홀로 찾았다고 했다. 편안한 추리닝과 운동화 차림으로.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지만 영호의 편식으로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버섯 리소토를 먹은 후, 영호와 이별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녀는 머쓱한 듯이 웃으며, “나 참 나쁜 년이지? 진짜 이상하지?”란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그녀가 한 일이라곤 영호와 자신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은 것뿐이다. 그것이 진정 그녀가 잘못한 일인지 돌이켜보건대 솔직히 정말 잘 모르겠다. 그리고 반대로, 영호도 잘못한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저 자신에게 맞춰주는 상대를 기꺼이 감사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지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사람은 이렇게 상처 주는 사람 없이, 상처받는 사람 없이 담백하게 끝났다.
지수는 기지개를 켜며 영호와 이별을 한 후,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후련했다고 했다. 이제는 마음대로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또한 그런 지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덧붙였다. “이제 네가 운동화를 신거나 추리닝을 입어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개운하다는 듯 높은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을 할 때 온 힘을 다하느라 내가 지치는 것도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알고, 상대와 나의 균형을 잘 잡는 기술. 단순히 상대의 마음을 애태우기 위한 밀고 당기기가 아닌,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방향과 속도를 잘 잡는 것 말이다.
지수는 영호와 이별한 이후 아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종종 SNS에 올라오는 자유분방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앞으로도 그녀가 어떤 사랑을 하든, 지금처럼 그녀 다운 모습으로 행복할 수 있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