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지현이 떨어졌던 바로 그 대교 위에서 재명은 눈을 감고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신에게 맡겨놓은 행복이라도 있는 양 이제는 제발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오늘로써 재명이 지현을 떠난 건 딱 5년이 되었다.
그들은 한때 너무 뜨거워서 서로가 불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랑을 나누었다. 재명은 자그마한 지현의 손을 잡고 꽃이 있는 곳으로, 바다가 있는 곳으로 참 많은 곳을 함께 여행을 다녔다. 밸런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이면 지현의 하얀 목에 어울릴만한 예쁜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했고, 크리스마스에는 좋은 와인을 나누어 마시며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현은 결핍이 많은 사람이었다. 늘 그녀의 곁에 재명이 있어 주길, 그녀의 하루를 온전히 재명이 함께해 주길 바랐다. 재명의 마음속 타오르던 불길이 조금 잦아들기 시작하자 지현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리고 곧장 재명을 채근하고 서운해하며 투정했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절망하며 화를 냈다. 그럼에도 재명은 여전히 지현을 사랑했다. 자신이 지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며, 더욱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일 뿐이라고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지현은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 독처럼 재명의 사랑을 더욱더 갈구했다. 재명은 자신이 시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모든 시간과 모든 마음을, 말 그대로 자신을 통째로 지현에게 붓고 또 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재명과 지현은 모두 점점 시들어 갔다.
재명이 지현의 손을 잡고 병원을 찾았을 때. 재명은 비로소 지현의 결핍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며 혼자 외로웠을 지현의 유년 시절을 전해 들으며 그녀가 안타까워진 재명은 그녀에게 더욱더 힘을 쏟았다. 밥을 먹을 때, 일어나고 잘 때, 어느 곳을 갈 때에도 재명은 마치 그녀의 아빠라도 된 것처럼 지현을 알뜰히 챙겼다.
그럼에도 무엇이 부족했을까.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세 달 만에 지현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재명이 이미 지현을 발견했을 때는 어떠한 손도 쓸 수 없는 때였다. 재명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현의 앞에서 절규했다.
재명을 5년을 꼬박 지현을 품고 살았다. 더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내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주변에서는 죄인인 양 덥수룩한 수염으로 매일 밤 술을 찾으며 죽어가는 재명을 보고 이제는 지현을 떠나보내야 되지 않겠냐고 위로했지만 재명은 그저 웃을 뿐. 그렇게 모든 걸 끌어안고 그렇게 5년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재명은 문득 돌려본 TV에서 사랑 영화를 한 편 보았다고 했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영화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자신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주곤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것 처럼 해맑게 웃어 보였다고. 그리고 그 순간, 재명은 머리에 무언가가 번뜩였다고 했다.
재명은 그 잠깐의 한 장면을 통해 지현과 자신의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렸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때처럼 다시 사람같이 살고 싶단 생각이, 다시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 밤 재명은 밤새 뜬눈으로 지현과 자신이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을 되뇌었단다. 그리고 처음 만나던 그 순간부터 지현이 떠나기까지, 하나의 빠짐없이 두 사람의 추억을 모두 꼭꼭 씹어 넘긴 후에야 비로소 지현을 떠나보낼 마음을 먹기로 결심했다고.
오랜 고민 끝에 재명은 술병을 내려놓고 지현을 찾아왔다. 그리고 지현이 떨어졌던 그 자리에서 한참을 빌었다. 이제 적당히 울고, 적당히 웃는 그 평범함을 찾고 싶다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다시 사랑을 하고 싶다고...
재명은 신에게 빌었다. 염치없어 보일지라도 이제는 행복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