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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GXING Apr 04. 2024

지진을 겪고 나서야 향내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대만 생활]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가 빈번한 대만, 그들의 신앙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이 멈췄다. 역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역과 역 사이 지하터널 중간에 멈췄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던 터라 순간 멈춘 지도 모르고 있다가 한동안 지하철이 움직이지 않아 그제야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둘러봤다. 


타이베이 지하철 노선은 6개로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노선 색깔로 편하게 부르곤 한다. 집에서 회사까지 이어지는 지하철은 레드라인(red line). 멈춰 있는 지점은 원산(圓山)역과 민촨시루(民權西路)역 사이. 시간은 아침 8시 전후로 기억한다. 


출근길 지하철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다닥다닥 사람들이 붙어 있다. 엉겁결에 옆 사람 핸드폰 화면이 보인다. SNS로 지진이 났다고 알리고 있다. 지진? 지하철 진동 때문인지 지진의 흔들림을 여실히 느끼진 못했기에 그냥 그런 지진인가 보다 했다. 사람들도 차분했다. 


5분 이상 멈췄던 것 같다. 다시 천천히 움직인다. 일단 민촨시루역 도착. 안내방송이 나온다. 모두 내리란다. 지진 발생으로 운항이 당분간 어려운 상황이다.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오전 8시 50분에 이른 아침 회의가 있어 회사 가야 하는데.. 민촨시루역에서 회사까지는 20분 정도면 가니 아직 늦진 않았다. 


그런데 여진이다. 플랫폼에 분명 똑바로 서 있는데 ‘똑바로’가 안된다. 내가 흔들리는 건지 플랫폼이 흔들리는 건지 앞을 바라보는데 물결 속에 있는 기분이다. 둘 다 움직이는 것이겠지. 


나중에 찾아보니 이 여진 진도는 6.5였다. 처음 지진 강도는 7.2였고. 대만에서는 25년 만에 가장 센 지진이었다. 1999년도의 921 대지진 규모가 7.7이었단다. 921 지진으로 2,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진앙지와 가까웠던 난터우현과 타이중 지역에 피해가 집중됐고.  


대만 기상서 지진 발생 안내 지도. 7:58의 7.2 강진과 8:11의 6.5 여진이 표시돼 있다.
타이베이 시내 공사중 건물에서 떨어지는 건자재(영상 캡쳐)/ 건자재에 부딪쳐 부서진 건물 모습


하여간 여진도 심상치 않은 규모로 발생하자 플랫폼에서 운행 재개를 무한정 기다리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한국에 가 있던 와이프에게서 화상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와 함께 TV를 보다 대만 지진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빠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다른 한국인으로부터도 소식을 들었다 하고. 그들은 대만에 6~7년 거주해 오고 있는데 이번 지진이 가장 강력했단다. 각종 집안 물건들이 떨어졌고 제습기도 쓰러졌다는 소식이다.


일단 나도 밖으로 이동. 지하철 개찰구는 그냥 열려 있다. 지하철 입구 화면에 지진으로 운항이 중단되었고 40~60분 정도 후에 재개될 예정이라는 문자 안내가 나오고 있다.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봐야겠다. 택시나 버스를 찾는 와중에 지하철역쪽에서 지하철 운항이 재개된다는 안내가 나온다. 사람들이나 나나 부리나케 다시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지하철에서 모두 하차한 후 플랫폼에 대기 중인 사람들/ 지진 발생을 알리는 대만 지하철역의 안내 문자 화면


운 좋게 다시 지하철 탑승. 가다 서다를 반복해서 쐉렌역과 중산역을 거쳐 타이베이기차역에 도착했다. 다시 오랜 시간 멈췄다. 안되겠다. 이러면 약속 시간에 늦을 터. 타이베이기차역에서 약속 장소까지 자전거로 가면 20분이면 갈 수 있기에 자전거 거치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대만에는 유바이크라는 대중 자전거 시스템이 잘 마련돼 있다. 곳곳에 거치대가 있다.


그러는 와중에 결국 이날 오전 회의가 취소됐다는 문자와 전화가 왔다. 상대측도 출근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건물 엘리베이터도 멈춰서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진으로 4월 3일 오전 타이베이가 매우 어수선하다. 


회의가 취소되니 집 상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활절 연휴 학교 방학으로 아내와 아이가 한국에 며칠 가있는지라 집에 사람이 없다. 허나 집에 제습기를 틀어놓고 출근하라 해서 틀어놓고 나왔는데 옆집은 제습기가 쓰러졌단다. 우리 집 제습기도 안심할 수 없는 터. 제습기가 쓰러지면 물바다일 텐데. 아뿔싸.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머 특별한 변화는 없다. 1층에 내려와 있는 사람도 한두 명. 단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14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룻바닥에 몇 가지가 나뒹굴고 있다. 책장위에 올려 있던 나무 장식과 신발장 위에 올려놨던 자전거 헬멧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이 정도는 괜찮다. 관심사항은 제습기.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부서진 지구본과 떨어져 있는 옷가지/ 화장대 거울


다행이다. 여전히 제 할 일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아이 방과 안방에 틀어놓고 갔던 제습기는 정상 작동 중이다. 여진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일단 전원 코드 뽑고 통 안의 물을 비웠다. 


제습기는 무탈했지만 곳곳에 지진의 흔들림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다. 우선 안방 화장대 위 가로 세로 1미터 이상의 꽤 큰 거울이 틀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도 다행이다. 깨지지 않았다!


아이 방과 내 방의 옷장 옷과 책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지구본도 부서졌다. 부엌 쪽도 다소 소란스럽다. 그래도 깨진 것은 없어 다행이다. 치우는 것이야 퇴근 후에 하면 될 일. 부리나케 다시 회사로 출근.


유바이크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순간 절이나 사원의 향내가 코끝에 찐하게 느껴진다. 매일 지나쳐 가는 집 근처 궁이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지나갔을 터이나 이날 놀란 마음에 유독 더 느껴지는 듯하다.


집근처 도교사원


대만에는 골목마다 다양한 신앙 시설이 산재해 있다. 정말 골목골목이다. 다양한 믿음의 대상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寺), 묘(廟), 궁(宮) 등으로 대별된다. 사는 불교, 묘는 유교, 궁은 도교 사원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대만 정부 조사에 따르면 불교신자 35%, 도교신자 33%, 개신교 2.6%, 천주교 1.3% 등이다. 


허나 대만의 특징은 조직화된 정통 종교를 믿으면서도 다양한 민속신앙을 함께 믿는다는 점이다. 전체 인구의 80% 가량이 그러하다고 보통 얘기된다. 그러다 보니 사묘궁에서는 하나의 대상만 믿음의 대상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무속신앙 대상도 함께 모시거나 불교 도교 유교를 함께 두기도 한다. 


하여간 대만에 처음 왔을 때 골목마다 있는 크고 작은 종교시설이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고 신기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시설이 산재한 근원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지진을 겪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근원을 알 듯하다. 지진이나 대형 태풍 등 자연재해가 빈번한 이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무언가 기대고 정신적으로 의탁할 존재가 어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도 더 절실했을 터. 유독 코끝에 향내가 강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 자연스러운 발로가 아니었을까.


아무쪼록 이번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화롄지역 사람들의 평안과 안녕을 바라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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