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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 책이 재밌어?”

[2017년 딸아이 여덟 살 (3)]

by KHGXING

신기한가봅니다. 아빠가 자기 책을 붙잡고 읽고 있는 게 말이죠. 계속 읽고 있나 지켜보기도 하고 혼자 신나서 다음 책을 빼서 건네주고는 주인공 이름을 재잘거립니다.


"아빠, 이 요정들 예쁘지? 무지개 요정들이야. 레이첼하고 커스티가 루비, 엠버, 사프런, 펀 이런 빨강, 오렌지, 노랑, 그린 무지개 요정들을 구해주는 거다. 정말 재밌어. 난 다 읽었다. 한번 읽어볼래? 읽어봐!"


며칠 전이었습니다. 딸아이의 이 말에 넘어간 게. 수 십 권이 한 질로 돼 있는 이야기책 RAINBOW magic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읽는 모습이 기특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재밌어?" 화답하곤 아이가 건네준 1권을 옆에 앉아 부러 꼼꼼히 읽었습니다.


RAINBOW magic.png


근데 이게 '사단'이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일과가 생겼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다음날 아빠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 녀석은 바빠집니다. 부리나케 자기 방에 들어가 2권을 꺼내 와서는 "아빠, 자 여기" 이럽니다. 읽으란 소리죠. 아빠가 자기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아빠가 '읽고 싶어'하니 먼저 알아서 건네주는 '착한' 마음씹니다. 자기도 책을 꺼내와서 저와 나란히 앉아서는 책에 열중입니다.


다음날도 3권 Saffron the Yellow fairy는 제 차지였습니다. 딸아이가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시간 내어 읽었습니다. 아니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와이프는 이런 딸네미와 아빠의 케미가 재밌나봅니다. 그러면서도 짐짓 멀 그리 꼼꼼이 읽냐고 핀잔이죠. 대충 읽으랍니다. 이 녀석이 안보니 이제 다른 일 하라네요.


매일 딸아이 동화책 읽는 게 과업인 기분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대충 읽긴 또 싫었습니다. 아이가 어떤 책을 재밌어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게다가 나중에 딸내미가 책 내용을 물어보면 최소한 엠버가 조개껍질에서 구해줬고 사프런은 벌통에 갖혀 있었다는 정도는 자연스럽게 맞장구쳐줄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아이와 얘깃거리 하나 더 생기는 것도 좋았고요.


아무튼 딸아이는 신났습니다. 자기가 재밌어 하는 책을 아빠랑 같이 공유할 수 있고 얘기 나눌 수 있는 것이 기분 좋은가 봅니다. 이 녀석도 이제 그 기분을 아는 거죠. 그렇지 않은가요. 자기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다른 친한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은가요?


하여간 아빠가 자기 책을 읽는 게 신기하기는 한가 봅니다. 친구들에게 다 말하고 다닙니다. "우리 아빠는 레인보우 매직 책 읽는다! 재미있대!" 어제는 반 친구들과 동네 친구들에게 얘기했다네요. 오늘은 피아노 선생님께 "우리 아빠가 레인보우 매직 책 읽어요"라 했답니다.


이 녀석이 이제는 몰래 아빠 가방에 다음 책을 넣어놓습니다. 저녁에 늦으면 회사에서 쉬는 시간에 읽으라네요. 이것 참. 딸아이에게는 이제 일종의 놀이가 된 듯합니다. 숨기기 찾기 놀이처럼 말이죠. 그보다는 자기 책 읽는 아빠 독려 차원인가요.


'좋은 의도'가 '곤욕'이 되지 않게 이제 슬슬 출구전략을 고민해야겠습니다. 'M, 이제 각자 자기 책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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