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그라도에서 살라스(23.7km)
2019년 6월 13일(목)
빌바오에서부터 낯이 익은 스페인 청년이 5시 30분부터 짐을 싸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청년을 시작으로 일찍 길을 나서는 사람들은 줄줄이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서 다시 날이 찌푸려져서 알베 관리인이 빨래를 안으로 옮겨 놓았다. 다행히 빨래는 말라있었고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순례자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친절한 알베 관리인이 일찍 나와서 커피를 내리고 잼과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으면서 아침 준비를 해주었다. 아침을 먹고 알베를 나선 시간이 7시였다. 떠나는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해주면서 자신들이 만든 순례자에 관한 글이 적힌 책갈피를 주었다.
출발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뜻한 옷을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가게가 있었는데 문을 닫았다는 말이었다. 대신 여자 관리인은 셰어박스를 뒤지더니 간절기에 걸치는 조끼를 나에게 건넸다. 딱 내가 구입하고 싶었던 옷이었다. 지금도 그 옷은 내 옷장에 잘 걸려있다. 어제 오비에도에서 헛걸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섰다. 영주 씨는 마드리드 길을 걷느라 발바닥이 처참했다. 나처럼 알베에서 얻은 양말을 신고 치료를 하느라 늦게 출발한다고 했다.
이날 세 개의 산을 넘었다. 높이는 400m가 안 되었다. 캄파 고개를 넘으면서 예상을 했기 때문에 각오는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산 정상에 올라가서는 입었던 조끼를 벗었다. 조끼 덕분에 한기도 피하고 몸도 따뜻해져서 좋았다. 얼마나 감사한지.
살라스에 도착할 때까지 날씨는 맑았다. 이따금씩 흘러가는 구름은 간간히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걷기에 좋았다. 도로 옆을 따라 걷는 순례길은 코르네야로 향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큰 강이 있었다. 그다지 깊지 않아 보였고 생각 같아서는 들어가서 발도 담그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생각만 한 채 걸었다.
코르네야의 성당을 오른쪽에 두고 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바뀌었다. 안내판은 이곳이 수도원과 성당임을 알려주었다. 돌로 만들어진 십자가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지금 걷는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바라본 성당의 뒤편은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보수를 한 흔적은 보였지만 마음이 아팠다.
건물이 교회가 아님을 알고 있다. 움직이는 교회인 성도들이 한때는 가득 모였을 건물의 퇴락을 보니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교회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세 가지가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교회와 종탑이 커지고 높아질 때. 강대상이 화려해질 때. 성직자의 옷이 화려해질 때.
313년 이전까지 교회는 이 세 가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모였던 곳은 지하 공동묘지 아니면 성도의 집이었다. 강대상은 따로 없었고 설교자가 서면 그곳이 강대상이었다. 성직자의 옷도 다른 성도와 다름없이 허름했다. 그러나 313년 이후 지상으로 나온 교회는 이 세 가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타락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악명 높은 일본 고등계 형사들도 교회 다니는 사람의 말은 믿었다고 한다. 최소한 교회 다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체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하던 분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 잡히면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또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자결하기도 했다는 기록을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 암흑했던 시절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죄송하기만 하다.
실제로 영주 씨만 해도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만큼 이상의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혜원 씨와 마찬가지로 군인이었고 목사인 나에게 선입견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무너져가고 있는 코르네야 성당의 뒷모습이 내 조국 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순례길은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채석장을 지났다. 채석장을 지나자 그늘에 자판기가 있었다. 코르네야에서 따로 출발했지만 다시 만난 영주 씨와 콜라를 먹으면서 잠시 쉬었다. 너무 긴 휴식은 걷는데 힘을 들인다. 하지만 몸은 자꾸 쉬라고 말한다. 걷는 동안 이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다시 길을 나섰고 길은 마지막 산을 향해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던 길은 차가 지나다니는 길을 횡단하도록 했다. 처음 만나는 광경이라 당황했지만 노란색 화살표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진리이니 따라야 했다. 길은 숲을 지나고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한참을 걸으니 살라스 입구가 보였고 멀리 살라스 성당이 보였다.
마을은 작고 아담했다. 서둘러 공립 알베를 찾았다. 순례길에서 약간 벗어난 산 밑 외딴곳에 있었다. 알베를 찾아가면서 식료품을 구입할 만한 곳을 미리 눈여겨봐 두었다. 알베에 도착하니 오늘 아침을 깨운 스페인 청년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관리인은 없었고 그 친구의 손짓으로 대충은 뭘 하라는지 알 수 있었다.
영주 씨와 나는 각자 침대를 정하고 알베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을 교과서 읽듯이 끝냈다. 그 일을 끝낸 줄 알았는지 관리인이 도착해서 접수를 받았다. 나중에 관리인은 내일 먹을 것이라며 작은 봉지에 하나씩 들은 빵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자기 집으로 갔다. 식당은 작았지만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서로 저녁 먹는 시간이 달랐다.
우리는 저녁과 아침을 샌드위치로 대체했다. 싱글인 영주 씨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참치와 양파를 소스에 버물려서 식빵 사이에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저녁을 먹었다. 남은 것은 내일 아침에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살라스에 도착한 시간부터 날이 흐려졌다. 그리고 산 밑에 있어선지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하지만 순례자들의 이야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온 할아버지는 성대에 이상이 있는지 말을 할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그 쇳소리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웃었다. 영주 씨와 나는 한쪽 귀퉁이에 앉아서 각자의 발을 치료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했지만 영주 씨는 조금 심각했다. 그러나 한참 웃던 순례자들은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기겁을 했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 잡힌 곳에 넣어두는 것은 군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고는 하나같이 아프지 않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마침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이탈리아 여성이 있어서 한번 해보라고 했다. 통역기를 돌려서 삼일이면 물집 낫는다고 했지만 그 여성은 듣지 않고 진물을 짜내고 밴드를 붙이는 걸로 대신했다.
9일 후 멜리데에서 만난 그 여성은 그때까지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영주 씨가 한마디 했었다. “그때 실 넣었으면 나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