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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식 Oct 17. 2019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21일: 오비에도에서 그라도(28.1km)

2019년 6월 12일(수)


오비에도 알베를 나와서 대성당 앞에 섰다. 대성당에서 왼쪽으로 돌면 프리미티보 순례길이 시작된다. 그 앞에는 프리미티보 순례길을 개척한 알폰소 2세의 동상이 있다. 

알폰소 2세 동상. 

그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마을을 산티아고라 명명했고 성당을 건축하게 한다. 그리고 몸소 산티아고까지 순례길을 떠난다. 그가 걸었던 길이 지금 내가 첫발을 내딛는 프리미티보 순례길이다. 그에게도 처음 순례길이었고 나에게도 처음 순례길이다. 처음이란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며 북쪽 길에 이어 프리미티보 길의 첫발을 내디뎠다. 











도심지라서 그런지 노란색 화살표는 없었다. 대신 바닥에 청동으로 된 조개가 순례자들의 안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시내를 통과하던 때 건너편 길을 걷는 순례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핏 보기에 동양사람 같아 보였다. 잠시 동안 멀뚱히 쳐다보던 그분이 먼저 “한국분이세요”하며 말을 걸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선생님” 산탄데르에서 스님 일행을 만나고 처음 만나는 한국 분이었다. 

청동으로 만든 조가비 안내표지. 

그분은 북쪽 길 포르투갈레테에서 포베냐까지 길을 걷다가 싫증이 나서 여정을 바꾸었다고 했다. 포르투갈 길을 걷고 산티아고에서 거꾸로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4개월을 길 위에 있었다고 하니 이제 21일 되는 나는 명함도 내밀 처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거쳐 온 길을 물어보면서 걷기 좋았냐고 물었다. 나는 걷기 좋은 길이었고 바다를 보며 걸어서 마음이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서로 가는 길이 반대여서 순례길 잘하라는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며 다시 길을 출발했다. 








도시, 언덕, 산, 하늘과 구름 그리고 길.

오비에도는 꽤 큰 도시였다. 아스투리아스 주(州)의 주도라고 하니 내 고향 전라북도의 전주에 해당하는 도시였다. 4차선 도로 끝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한 시간 넘게 걸었고 잠시 휴식한 후에 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 오비에도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서 우의를 입어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하게 했다. 

산을 넘어 이어지는 길은 이곳도 스페인임을 알려주듯이 넓은 초지로 이어졌고 그곳에도 역시 스페인의 다양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길은 지나온 길과 걸어야 길을 보여준다. 

순례길은 고요했다. 어제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여성은 말이 통하는 스페인 사람과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들은 도심에서 길을 헤매면 여지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스마트폰에 나온 지도를 보면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켜 주었다. 공원에 도착해서 표지석이 있기에 앞으로는 이 표지석과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서 길을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뒤에 오는 나를 보고는 자기 곁에 있는 표지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손을 흔들었다. 

저만치 가던 그들이 야트막한 등성이로 사라지고 다시 혼자서 길을 걸었다. 

도심에서 벗어나자 들리는 것은 이름 모를 새소리뿐이었다. 이런 고요함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자연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나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도 바람의 속도에 비래 해서 틀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벌레들과 새들의 나는 높이도 다르다는 것도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자연을 보고 느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얼마 뒤 나는 기록적인 폭염이 덮친 유럽의 날씨에 깜짝 놀랐다. 25일을 전후해서 아내는 나에게 거기는 덮지 않냐고 매일 물었다. 나는 더위와는 상관없이 걷기에 너무 좋은 날씨여서 여기는 스페인이 아닌 줄 알았었다. 


초록의 바다에서 홀로 빨간색으로 빛나는 꽃.

전곡에 근무할 때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병사들 위문을 자주 다녔다. 그곳은 1953년 이후로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곳이었다.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백마고지에도 갔었다. 그곳에서 바라본 철원평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 봤던 비무장지대의 초록은 지금 걷고 있는 스페인의 초록보다 더 짙은 색이었다. 새들은 사람들이 갈라놓은 경계선은 우습다는 듯 마음껏 남과 북을 날아다녔다. GP에 들어가면서 보았던 억새의 높이는 내가 봤던 억새가 얼마나 어린지를 알게 해 주었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통일이 되어도 비무장지대는 자연보호구역으로 묶어놓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곳을 관광할 때 필요한 숙박시설은 GP와 GOP의 초소들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자연을 느끼며 걷던 나는 어느 작은 성당 입구에 5명의 순례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를 본 그들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프리미티보 길은 오비에도에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인지 오비에도 알베에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순례자들을 많이 만났다. 오비에도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은 나와는 달랐다. 아무래도 긴 시간 걸은 나보다는 활기도 있고 막 순례길을 출발하는 설렘도 읽을 수 있었다. 나를 부르는 그들은 오비에도에서 순례를 시작했었다. 그들은 세요를 찍고 있었다.

셀프 세요를 처음 봤다. 이후에도 여러번 봤다. 저들도 나름의 기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룬에 도착한 기념으로 시청에서 찍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는 잠을 잔 곳에서만 세요를 찍었다. 그런데 이 작은 성당은 알베가 아님에도 세요가 있었다. 물론 기념으로 세요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세요를 찍다 보면 세요의 소중함이 퇴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세계에 단 두 장 남은 우표가 경매에 올라왔었다. 그런데 우표를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두 장 중 한 장을 경매장에서 찢어버렸다. 남은 한 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지금도 세요를 보면 그곳 알베가 생각이 나고 그때 걸었던 길들이 눈에 선하다. 세요의 목적이 이런 것이면 좋으련만 바르에서도 세요를 찍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은 실망을 했다. 


나는 괜찮다는 손짓을 하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높지 않은 산을 넘고 강을 끼고도는 포장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순례길은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가 이곳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다시 시골길로 이어지는 길은 흐린 날이어서 망정이지 뜨거운 뙤약볕에서 걸었으면 큰일 났겠다 싶었다. 멀리 보이는 언덕을 넘을 수 있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들판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마치 빨리 가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천천히 걸으면서 마음껏 자연을 보고 즐기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직선이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곡선의 미학이 이래서 좋은 것 같다. 

정오를 지난 태양이 머리에 있는 시간 낮은 언덕을 넘으니 멀리 그라도가 보였다. 지도를 보니 맞았다. 넓은 들판 건너편에 자리 잡은 그라도가 멋있어서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곳에서 40분을 걸어서 그라도의 알베에 도착했다. 13시 40분이었다. 

보인다고 도착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야 도착한 것이다. 멀리 보이는 곳이 그라도.

보인다고 해서 다 온 것이 아님을 새삼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포베냐에 갈 때도 산과 산사이에 바다의 귀퉁이가 보여서 참 반가웠었다. 하지만 그 길을 2시간을 걸어야 했다. 이때 보인다고 도착한 것이 아니라고 마음에 새겼는데 그걸 잊은 나를 다시 깨우치는 시간이었다. 

그라도 공립 알베는 침대가 16개였다. 그래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하지만 길은 나에게 천천히 보고, 느끼고, 즐기라고 했다. 알베 앞 공원에 도착했을 때 과연 내가 알베에서 잘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알베 앞에 도착해보니 내가 열 번째로 온 순례자였다. 빌바오에서부터 낯이 익은 나와 같은 키의 스페인 순례자가 인사를 해서 말이란 걸 잊을 뻔한 나에게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해 주었다. 


14시 인자하게 생긴 부부가 문을 열고 순례자들을 맞아 주었다. 아내는 동양계인지 피부색이 나와 같았다. 내 앞에도 동양인이 서있었는데 둘이서 여권을 꺼내면서 “한국분이세요” 했다. 외롭게 길을 걷겠거니 했는데 말동무가 생겨서 기뻤다. 아내는 접수를 받고 남편은 접수가 끝난 순례자들에게 알베 안내를 해주었다. 여자 관리인은 우리가 한국인인걸 알고 접수를 끝내면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열심히 따라 했지만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는지 셋은 큰 소리로 웃었다. 

영주 씨는 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났다. 마드리드 길을 같이 걸은 스페인 남성에게 프리미티보 길에 대해서 듣고 열차 편으로 어제 오비에도에 도착했다고 했다. 여태까지 하라는 것만 하고 살았고 그게 억울해서 해보고 싶은 것 하고 싶어서 시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둘이 가까운 마트에게 가서 냉동피자와 라면을 구입했다. 라면은 안에 있는 수프는 버렸다. 대신 영주 씨가 가지고 온 한국 라면 수프를 넣어서 먹었다. 라면 국물을 한 수저 입에 넣는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매콤하면서 단맛이 섞였지만 그렇다고 달지만은 않았던 그 개운한 맛은 지금까지 잊었던 매운맛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둘이서 라면 두 개와 냉동피자를 먹는데 걸린 시간은 20분이 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었어도 해는 아직 지지 않았고 나는 알베 아래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봤다. 흐렸던 하늘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면서 간간히 햇살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을 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들었다.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장해간 노래를 틀으니 전에 듣다가 멈춘 곳이 이 노래 전이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들으며 올려다 본 하늘. 노래와 어쩌면 그리도 궁합이 잘 맞았는지 모르겠다. 

48살에 타국 땅에서 길을 걷다 들은 노래는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구간에서 내 마음을 찡하게 했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헛살지 않았지. 잘 왔고 앞으로도 잘 갈 수 있어” 하며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하늘을 보니 하늘도 그렇다는 듯이 파란 하늘 아래로 찬란하게 햇빛이 퍼지고 있었다. 

여정의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본다. 반면에 변하지 않는 일상에 적응해야 할 두려운 마음도 있다. 

하지만 여정을 끝내고 돌아가서 맞이하는 일상은 여태까지의 일상과는 다를 거라는 확신을 해본다. 여기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나에게 들려주신 약속의 말씀이 달라진 내 인생 후반전에 꺼지지 않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반복해 들으며 흥얼거리는 시간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한 번 들어보시라 정말 힘이 나는 좋은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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