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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식 Oct 17. 2019

산티아고를 추억하며

    

 37일의 걷기를 끝낸 다음 날 나는 산티아고로 왔다. 산티아고 버스 정류장에서 포루투로 가는 왕복 버스표를 구입했다. 포루투에서 2박 3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헤리포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서 렐루 서점에서 인증샷을 찍어 딸에게 보내주었다. 이외에도 유명한 관광지도 가보며 고생한 나에게 오랜만에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7월 1일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처음 산티아고에서 묶었던 알베에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 숙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짐을 정리하고 순례자 증명서를 받으러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성당을 등지고 오른쪽에 있는 호텔 내리막길로 간 다음 처음 나오는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300m쯤 가면 왼편에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물로 가면 된다.

증명서를 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서로가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즐겁다.

안에 들어가니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끝에 가서 줄을 섰다. 줄은 점점 줄어들어 내 순서가 되었다. 크레덴시알과 한국 여권을 보여주니 증명서를 만들어준다. 

어디서 출발했냐고 묻기에 프랑스 바욘이라고 했더니 머리 하얀 할머니께서 약간 당황스러워하시며 옆에 있는 젊은 여성분에게 뭐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무언가를 상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거리를 적어줄 것인지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868km를 적어주었다. 

나는 바욘을 거쳐 이룬에서 출발하는 북쪽 길을 걸었고 이어서 프리미티보 길을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왔으며 묵시아, 피스테라까지 두 발로 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에 민감한 나라에서 교육받은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숫자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할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걸었다는 게 중요하지. 길 위에서 얻은 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니?”

그 웃음에서 이런 말이 들리니 나도 더 이상 숫자의 종노릇 하기는 싫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사람 안 된 것이 정말 기뻤다. 


맞다. 세상에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사랑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감정을, 아픔을, 슬픔을 사람이 느끼는 모든 것들 중에 과연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숫자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더 큰 숫자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숫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은 영원히 남는다. 사랑까지도 숫자 노름에 오염된 지 오래니 나는 그 할머니를 통해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7월 2일 파리에 도착했고 3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4일 오전 11시에 귀국했다. 지하로 내려가 김치찌개를 먹었다. 매운맛은 만세를 부를 만큼 좋았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본 동트는 하늘. 

44박 45일 동안 난 37일을 걸었다. 군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과 체력측정을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몸 관리는 했다. 하지만 전역한 지 2년이 지난 내 몸은 긴 시간 장거리를 걸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 탈 없이 무사히 걸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은 37일 동안 홀로 걸었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알베와 알베 사이의 길을 홀로 걸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나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으로 만들고자 무진 애를 썼다. 


사람인지라 별별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때는 일부러라도 찬양을 불렀고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셨고 만나 주셨다. 데바에서 라라베추로 가던 숲 길, 구에메스에서 산탄데르로 가던 숲길에서 나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손길을 체험했다. 

비단 이 두 날만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걸을 수 있는 힘과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는 손길과 잠잘 수 있는 곳을 통해 하루하루가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있었음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나를 산티아고로 보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 가정은 어려운 광야를 잘 견뎌내며 통과하고 있다. 아내는 이 모든 상황에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산티아고가 뭘까?라는 답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티아고는 인생이다. 인생이 걸어간 흔적을 인생길이라 말한다. 그러니 산티아고는 길이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산티아고 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비단 발자국뿐만이 아니라 발자국이 걸어온 삶의 이야기도 있다. 

쌓인 삶의 이야기에 내 삶의 이야기도 있다. 글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야 하나 고민이 된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산티아고 위에 나를 세울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도했다.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에서인지 나의 산티아고를 아직 끝맺기가 싫다. 하긴 인생길도 끝에 가야 끝이 나는 것이니 굳이 산티아고의 끝을 맺지 않아도 될 듯싶다. 나의 산티아고 1막은 잠시 막을 내린다.

또 보자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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