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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아 Jul 20. 2021

마더 아님, 마녀임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 재해석하기

<성냥팔이 소녀> 재해석.

내면의 상처와 마주하고 스스로를 용서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





오후 2시 30분. 여전히 침대 위다. 뺨에 달라붙는 과자 부스러기, 어깨 위에 펼쳐진 과자 봉지. 충전기를 제대로 꽂지 않아 곧 꺼질 것 같은 핸드폰. 암막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내 발끝을 겨눈다.

‘하, 또 살아 있네.’

허리를 들어올려 앉는 것조차 버거운 나날. 베개와 침대보에 파고들 때마다 그래도 내게 아직 좋은 감정을 느낄 여지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겨우 핸드폰을 켜니 역시나 톡 옆에 보이는 숫자, 300+ 


- 아직도 자니? 

-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 엄마 미치는 꼴 보고 싶어?

- 제발... 답 하나만 해주렴... 

- 너 엄마가 기어코 죽어야만 속이 풀리겠니?


7년 전 나는 직장을 핑계로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뛰쳐나왔다. 처음 느낀 해방감이었다. 사실 일부러 집에서 먼 직장만 골라서 입사 지원을 했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라면, 그렇게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지방의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꿈꾸던 독립을 했다. 

엄마는 나 없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 양말 하나도, 연필 하나도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빠와 이혼한 뒤부터는 아직 있지도 않은 내 미래의 배우자를 맘대로 상정해놓고 좋은 집에 시집가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들을 하나씩 가르쳐왔다.

난 생존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처음 2년 정도는 자유에 취해 살았다. 혼밥 만랩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홀로 고기집 가기는 나에게 두려운 도전이 아니라 놀이였다. 집 근처 헬스장에서 개인 PT도 받으며 원하는 체중도 만들었다. 어떤 소개팅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약 5년간 처음으로 결혼을 꿈꾸게 한 남자 친구와 꽤 깊고 진한 연애를 했다.

그러다 1년 전 남자 친구가 갑자기 시간을 갖자고 통보했고 그가 다시 보자고 한 날 그래도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갔다. 그러나 그날 나는 가장 두려웠던, 아니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게 되었다.


“너... 너네 엄마랑 똑같아. 숨 막히고 질린다.”


엄마랑 똑같다... 엄마랑 똑같다... 엄마랑 똑같다... 이 말만 되뇌며 집에 왔다. 그렇게 한순간에 차이고 와 철퍼덕 침대에 쓰러져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천장 벽지에 미세한 패턴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다음 날,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연락이 잘 안 되자 참다못한 엄마는 회사에 전화를 했다가 내가 퇴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연락과 집착은 더 심해졌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싶었는데, 번호를 바꾸러 나가는 일조차 버거워 그냥 뒀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은 겨우 솟아오르곤 했던 열정의 불씨마저 종적을 감추었다. 고독사는 어떻게 당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문득 침대 옆 책상 위에 놓인 남자 친구가 선물로 줬던 성냥이 눈에 들어왔다. 이별한 그날 다 버리려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개비만 남겨두었다.

손을 뻗어 성냥을 집으려다 놓쳐버렸다. 성냥이 쏟아졌다. 총 7개. 집으려면 일어서야만 했다. 일어나 성냥을 집어 하나를 켰다. 탁, 탁! 타오르는 불씨에 화들짝 놀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 불이 손가락에 닿는 게 무서워 성냥개비 끝으로 급히 손을 옮기다 결국 후 불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고독사를 생각한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두 번째 성냥을 집었다. 불을 켜는 찰나 또다시 이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너, 엄마랑 닮았어. 너가 그렇게 싫어하던 니 엄마랑 똑같아.”


불씨와 함께 9살 그 겨울이 떠올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원을 마치고 씩씩하게 혼자 집에 왔다. 열쇠로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그렇게 집착하니까 숨이 막힌다고 숨이!”

“뭐? 집착? 딴 여자랑 바람난 인간이 할 소리야?”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냐고! 결혼 직전에 있었던 일로 계속 이러는 게 정상이야?”

“웃기시네. 안 들켰을 뿐이지 그 뒤로도 최소 3명은 있었던 거 모를 줄 알아? 이 뻔뻔한 인간아! 당장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신발을 벗어던진 채 내 방으로 얼른 들어가 이어폰을 꺼내 귀를 막았다. 스케치북을 펼쳐 내가 좋아하는 유니콘을 그렸다. 무지개색 뿔을 갖고 있고 보라색 털을 가진 신비로운 나만의 수호천사. 


그때 성냥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내 유니콘도 서서히 지워진다. 유니콘의 발굽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세 번째 불을 켰다.


“이딴 거 그리고 있을 시간에 공부나 해!”

엄마가 갑자기 스케치북을 낚아챈 바람에 종이가 찢어지면서 유니콘의 뿔이 반으로 갈라졌다. 내 눈앞에 떨어지는 유니콘 반쪽. 무지개는 그렇게 잘려나갔다.

고함을 지르며 집을 나가는 아빠. 쾅 소리 뒤에 남은 아빠의 발소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콧바람까지 내가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엄마.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 장면. 반쪽짜리 유니콘 뿔 위로 떨어지는 눈물. 분명 빨주노초파남보 다 갖고 있었는데, 빨주노만 남아버린 뿔.


빨주노 뿔과 성냥불이 겹쳐 보인다. 눈이 뜨거워진다. 어렸을 적 남겨놓은 눈물을 다 쏟아낼 기세로 울었다. 성냥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져 불을 껐다. 나의 유니콘도 함께 죽었다. 내 유일한 희망이 떠났는데 애도 한번 하지 못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갑자기 들이닥친 상실감에 당혹스러웠다. 슬펐다.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내 침대 자리. 과자 봉지, 컵라면 용기로 가득 찬 주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게 싫어서 도망쳐 나왔는데, 내가 날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이 바뀌는 게 보인다. 신경 끄고 싶어 무음으로 해놓은 지 오래됐는데 오늘따라 전화로 바뀐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휴대폰 화면) <마더 아님, 마녀임>


남은 성냥 4개. 한꺼번에 다 켜고 싶어 다 들고 거실로 갔다. 나의 유니콘을 소환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떠올려도 유니콘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유니콘은 웃고 있었나? 눈망을은 어땠지?

암막커튼을 거뒀다. 그제야 눈앞에 들어온 세상의 모습. 겨울이구나. 다 녹지 않은 눈이 희끗희끗 바닥을 메우는 겨울의 끝자락. 방구석에 널브러진 아로마 향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을 동그랗게 놓고 초를 켰다. 촛불로 둘러싸인 원 안으로 들어와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유니콘이 어린아이로 변했다. 억지 미소를 짓던 아이가 입술을 삐쭉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울어도 된다고, 괜찮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토닥여준다.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목 놓아라 운다. 울면서 계속 자책한다. 자기는 참을성이 없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거라고. 결국 혼자가 될 거고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라고.

그 아이를 힘껏 안아준다. 내가 너의 유니콘이 되어주겠다고,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외친다. 그 아이는 내 옷자락을 붙잡는다. 나도 그 아이를 더 힘껏 안아준다. 마음에 지진이 난다. 그래도 절대 다그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지금의 나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무쓸모해 보이는 하루하루도 다 나의 것이고 내가 이룬 것이고 나의 일부일 뿐이라고. 유니콘의 뿔이 무지개색이 아니어도 괜찮듯이 이것도 내가 만든 균형일 뿐이라고. 너무 힘드니까 잠시 무너짐을 택했을 뿐이라고 속삭인다. 아로마 향이 내 몸을 감싸고 그 사이로 유니콘이 처음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다. 유니콘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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