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텃밭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여름 4장

by 조이홍

한해살이 식물이 전부인 한 평 텃밭이 가장 싱그러운 계절은 누가 뭐라 해도 여름이다. 특히 7월 말, 8월 초의 그 작은 정원은 인생에서 꽃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자연(꽃)에서 비롯된 말을 다시 자연(채소며 과일)에 적용하는 묘한 상황이지만, 왠지 이 시기의 텃밭을 표현하는 단어로 이보다 더 적확한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늦은 밤 영화 채널에서 우연히 본,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원숙미 넘치는 장만옥과 양조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영화 <화양연화> 때문일지도 몰랐다. 특히 그 영화의 감독이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인 편집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왕가위라면 의구심은 곧 확신이 된다. 붉은 방울토마토, 주황빛 대추토마토, 청녹의 풋고추와 파릇한 오이들, 매혹적인 자줏빛 가지와 생기 넘치는 푸른 잎사귀들이 어우러진 한 평 텃밭의 화양연화는 소박하지만 건강한 밥상을 위한 싱싱한 재료들이 절정을 향해 달음박질한다.

eggplant-5902352_1920.jpg <하필 가지는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어 Pixabay 이미지를 활용한다>

언제나 주목받는 주인공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욕심꾸러기,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오이를 뒤로 하고 고운 누이 같은 가지들이 보일 듯 말 듯 조용히 자태를 뽐낸다. 모종을 심으며 결실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늘 실망을 안겨준 가지이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더랬다. 원산지(인도)에서는 여러해살이 식물이지만, 혹독한 추위를 견뎌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진자줏빛 식물은 한해살이로 자란다. 물컹한 식감 때문에 아이들은 질색하는 채소지만, 바로 그 식감 때문에 아내와 나는 참 좋아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가지가 탐스럽게 열리자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분 좋았다. 물론 1등은 아니지만, 땅을 파보아라 5천 원이 거저 생기랴. 갓 따온 싱싱한 가지 3개로 지은 가지밥에 아내의 특제 소스를 얹어 먹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그릇 뚝딱이다. 아이들 얼굴에는 불만이 한가득이지만, 눈치는 빨라서 맛나게 먹는다. 물론 뼈 있는 말은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맛있는 가지밥은 1년에 한 번만 먹으면 좋겠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다음 날 저녁도 가지밥임이 분명하다. 가지는 날씨가 더워지고 햇볕이 좋은 7, 8월에 유독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맺는다. 가을 서리가 내릴 때까지 수확할 수 있어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한 평 텃밭에서 가지는 8월 말까지만 만날 수 있다. 정상에 있을 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는 건 비단 사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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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흥행 참패에도 불구하고 고추 삼총사(풋고추, 롱그린고추, 청양고추)에게 내심 기대를 걸었던 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손바닥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한 평 텃밭에도 유난히 햇볕이 잘 드는 명당이 있디. 이는 마치 와인의 '테루아'와 같아서 물리적, 생물학적 환경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쌓아온 노하우 사이의 상호작용이 발휘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다. 부엽토를 충분히 섞어 고슬고슬한 흙에 건실한 지렁이 몇 마리를 봄비 내리던 어느 날 고이 모셨더랬다. 바로 그 자리에 고추 삼총사 모종을 심었다. 뿌리와 가지가 튼튼히 뻗어나가도록 압축 계분도 충분히 뿌렸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한 평 텃밭을 경작한 이래 고추 농사가 대풍(大豊)을 맞았으니 말이다. 공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텃밭 4대 천왕'이 보기에는 '애개 그게 대풍이라고?' 할 터이지만, 그간 감히 고추라고 부를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 소박한 텃밭러에게 수십 개에 달하는 고추는 풍년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풋고추는 품종이 아니라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로 된장 등에 찍어 먹는 생식용 고추를 의미한다. 풋고추가 익으면 홍(붉은)고추가 된다. 매운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가끔 아삭한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찌어 찬밥과 함께 먹으면 별미도 그런 별미가 없다. 가끔 입안을 마비시키는 센 녀석을 만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생하기도 하지만 한 번 입에 밴 자연의 맛을 잊기란 쉽지 않다. 그런가 하면 롱그린고추는 아예 양상추처럼 아삭아삭한 식감과 단맛이 감도는 깔끔한 맛이 일품인 품종으로 개발되었다. 아빠만큼 매운맛을 싫어하는 첫째 아이가 '辛세계'에 발을 들인 것도 롱그린 덕분이었다. 고추 농사가 대풍을 맞았으니 이대로 해피 엔딩이면 좋으련만 엄청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추밭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청양을 심으면 다른 품종도 모두 청양화가 된다는 전설이다. 한 평 텃밭에서 수확한 고추가 저녁 식탁에 오른 날 허구는 사실이 되었다. 길고 푸른 롱그린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 매운맛이 청양고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맵다는 단어는 그 매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싱크대로 달려가 고추를 뱉어내고 함께 밥상에 오른 오이로 혀를 쓱쓱 싹싹 문질러야만 했다. "당신은 참 매운 걸 못 먹어." 하며 호기롭게 롱그린을 낚아챈 아내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렇게 한 평 텃밭에서 '멘델의 법칙'은 다시 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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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 텃밭의 스테디 샐러 방울토마토도 작황은 더할 나위 없다. 텃밭에 오를 때마다 가지치기를 해주었건만, 곁가지가 뻗어나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덩굴을 이루었다. 가지치기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땅에서 흡수한 에너지를 열매 맺는데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가지와 잎이 자라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과일 수확량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알알이 좀 작을 뿐 소풍(小豊)이라고 부를 만했다. 특히 주황색 빛깔이 탐스러운 대추방울토마토(정확한 명칭은 대추형 미니토마토)가 크기와 수확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맛도 일반 방울토마토보다 훨씬 달고 고급스러웠다. 까다로운 입맛의 아내도 맛을 보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해주었으면 맛 좋은 대추방울토마토를 더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내려놓았다. 한 움큼이지만 이웃들과 나누고. 과일과 채소를 멀리하는 둘째 아이도 맛있게 먹었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고, 좋은 일에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 평 텃밭도 이러한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식물이 잘 자라지만은 않았다. 가장 큰 충격은 마디 호박(애호박)이었다. 수확량이 달랑 하나뿐이다. 거짓말처럼 단 하나! 텃밭에 쏟은 노력이 호박만 건너뛰었나 싶을 정도로 참담했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고 노랗고 탐스러운 호박꽃도 여럿 피웠더랬다. 하지만 호박꽃은 쉽게 떨어졌고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호박의 참패는 비단 한 평 텃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텃밭 4대 천왕' 중에 가장 광활한 밭을 경작하는 반장님도 올해 호박 농사는 폭망했단다. 공교롭게도 고향집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쯤 되면 올여름 어딘가에서 호박들이 모여 모의라도 한 게 아닌가 싶다. 추한 인간을 빗대어 '호박 같다'라고 부르니 진짜 호박이 들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대대적인 호박 농사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이것도 기후 변화, 꿀벌의 실종 때문일까?


하나라도 건진 호박은 딸기에 비하면 양반이다. 하나 심은 딸기 모종이 한 평 텃밭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무섭게도 뻗어 나갔건만(쌈채소 자리를 몽땅 차지했다) 딸기는 구경도 못했다. 이것이 올여름 한 평 텃밭의 가장 큰 미스터리다. 몇 해 전에 딱 한 번 딸기 모종을 심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서너 알은 건졌더랬다. 당시 경험으로 한 평 텃밭과 과일(수박, 딸기)은 궁합이 맞지 않음을 배웠는데 올봄 마음씨 좋은 식물원 부부가 "이것도 한 번 데려가 보세요." 하며 덤으로 준 모종을 거절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히 치른 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되지 않았다. 행여 이런 뼈아픈 교훈을 일러주려는 대지의 여신이 그린 큰 그림일까? 청겨자, 청경채, 대파에 이어 호박과 딸기는 한 평 텃밭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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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다. 한 평 텃밭의 화양연화는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함께 저물어 간다. 하나가 피면 하나가 지는 법이다. 아직 오이꽃과 호박꽃이 듬성듬성 보여도 순환하는 계절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제 다음 계절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진짜 멋진 주인공은 무대에서 내려올 타이밍을 안다. 바람의 속삭임과 햇살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소박한 텃밭러도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너희들도 이제 다했구나. 덕분에 고마웠어." 여름을 들뜨게 해 주었던 그들과 정겹게 작별 인사를 나눈다. 세월이 이토록 무상하지만 표현하지는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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