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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Oct 20. 2021

피촐라의 우체부


너무 소중한 것들은 종종  소중함으로 인해 잃어버리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발짝  다가가다 그를 떠나가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고, 좋아하는 음식을 아껴 먹으려다 결국엔 상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밀실에 따로 보관해 두고는 두었던 곳을 까맣게 잊어버린 적도 있다. 우다이푸르에서 붙였던 ‘나에게 보내는 엽서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렸다. 너무나 소중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었고, 숨겨  곳을 나조차 잊어버리는 바람에 완벽하게 잃어버린 것이다.


“엽서를 써야겠어.”하고 맨 처음 마음을 먹은 것은 몬순 팰리스에서다. 나는 타르 사막을 빠져나와 남쪽 우다이푸르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틀 째 되는 날 아침에 호텔 테라스의 식당에서 급하게 끼니를 때우고 서둘러 오토릭샤를 잡아 탔다. “몬순 팰리스.”아주 심플하게 목적지를 말하고 요술 양탄자를 타듯 저 높은 산꼭대기까지 매끄럽게 달려 올라갔다. 산등성이를 빙빙 돌아 엔진을 태우며 다다른 곳엔 오래된 고성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오전부터 비가 내린 탓에 나는 얇은 우비를 입은 채였다. 어제까진 사막의 메마른 모래를 밟던 발로 빗물에 젖은 땅을 딛고 서 있으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가뭄을 견디어 내자마자 홍수가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고성을 방문하는 일은 내 오랜 로망이었다. 인도에서는 덕분에 여러 번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몬순 팰리스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성은 기대한 것과 달리 내부가 텅 비어있었다. 입장 티켓을 끊고 들어갔던 기억은 있지만 안에서 무언가 보았던 기억은 전혀 없다. 오래도록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빈집처럼 먼지가 쌓이고 외벽엔 낙서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쌀쌀함 때문이었는지  쓸쓸함 때문이었는지 몸은 무겁고 기분은 센치했다. 등이 굽은 꼽추가 교회의 종을 치기 위해 돌층계를 오르듯, 나는 좁은 나선형의 계단을 끝도 없이 올랐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비가 그치고 안개가 내려앉더니, 차츰 발코니 아래로 아름다운 피촐라 호수의 전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산꼭대기에 홀로 남겨진다는 , 어떤 기분이지? 나는 성에게 물었다. 대답 같은  돌아올  없었지만. 오랜 시간을 오직  사람만 기다리다 늙어버린 야수처럼 성은 거칠고 무심했다.


다시 안개가 성을 감싸고돌자  역시 외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 나를 떠나면  .몬순 팰리스에 발목이라도 잡혀 버린 듯 꽤나 난처한 기분이었다. 오전 시간을 내내  안에서 보낸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친  곧장 시내의 선물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엽서를   골랐다. 성에서 느꼈던 쓸쓸함이 서울을 더욱 그립게 만들어버린 덕분에, 그리운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것이다. 오후가 되자 거짓말처럼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왔다. 날은 선선했고 공기는 청아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피촐라 호수를 따라 나는 우체국으로 향했다.


요즘은 엽서나 편지, 하물며 우표를 붙이는 일 마저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엔 우체통과 공중전화가 있었고 드물지만 사용하는 일도 있었다.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전송하진 못하더라도 마음을 전하는 느린 감성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이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를 돌아, 끝이 없는 사막을 넘어 갈증과 배고픔을 견디다 보니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전송하는 대신 병사가 전장에서 전보를 붙이듯, 엽서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그리운 이들에게로 보냈다.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내 자취방에도 엽서 한 장을 붙였다.


수취인을 일일이 기억할  없지만, 분명  시절 가장 소중했던 이들에게 보냈을 것이다. 엽서가 인도에서 날아오던  분실되는 아쉬운 일도 두어  있었다.  여행의 끝에 서울로 돌아왔을 , 자취방 현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에게 보내는 엽서 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분실 없이 무사히 서울까지 도착해  것이 내심 고마웠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소중한 엽서를 잃어버렸다. 언제 잃어버린 것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다시 한번 수납장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역시나 엽서는 없다.


잃어버리게 된다면 슬플 거야. 지레 겁을 먹고 철저히 보관해  것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보관해둔 장소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다니.  읽은  사이에  넣었던 것을 모르고 책과 함께 팔아버렸던 것은 아닐까. 알라딘 중고서점의 기다란 책장 사이에서  엽서를 발견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매우 부끄럽겠는데.  면에 붙여 두었다 떼어낸 것이 다른 종이에 엉겨 붙은 채로 버려졌을지도 모르고.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가 버려졌다 생각하니 마음에 안개가 자욱이  것처럼 더없이 쓸쓸한 기분이다. 차라리 희망고문을 받고 싶다.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잊어버린 거라고. 여전히   어딘가에 푸르던 20대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어느  피촐라의 우체부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편지요!”하고 소중한 소식을 안고 나에게 돌아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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