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홍콩 대중음악의 배경 (1)
홍콩의 대중음악을 지칭하는 칸토 팝(Canto-Pop)은 홍콩에서 생산된 광둥어 대중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으로 홍콩이 대륙과 단절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으나, 이 도시 문화의 씨줄이라고 할 만한 본격적인 등장은 1970년대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홍콩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자 중화권 문화의 주문 제작 장소에 불과했다. 젊은 세대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문화를 즐겼고 장년층은 상하이에서 발전하여 대만에서 계속 전개되던 국어(중화민국의 표준어) 문화를 향유했다. 그러나 67년 폭동과 생활 수준의 상승 이후 광둥어를 사용하는 홍콩인이라는 인식이 점차 형성, 확산하였고, 그 결과로 70년대부터 칸토 팝을 비롯한 홍콩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최초의 칸토 팝 스타는 샘 후이(Sam Hui, 許冠傑, 허관걸)이다. 월극 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로큰롤과 컨트리 웨스턴 장르를 혼합하여 포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밥 딜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콩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노력한 가사는 홍콩인 전 세대의 심금을 울렸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가수로는 파울라 추이(Paula Tsui, 徐小鳳, 서소봉)와 위너스(Wynners, 溫拿)가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국어와 영어로 된 곡을 불렀다. 파울라 추이는 상하이의 유명 가수였던 바이광(白光, 백광)의 곡을 잘 불러 “작은 바이광(小白光)”으로 이름이 났었으며 위너스는 비틀즈를 따라하고자 했다. 이들은 샘 후이의 선풍적 인기 이후 광둥어로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과거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언어만 바꾼 정도였다. 아직 칸토 팝이라는 장르의 특징이 성립하지 않았던 반면, 광둥어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 커진 상태였기에, 기존 가수들은 80년대까지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홍콩의 경제적 활기는 칸토 팝을 더욱 발전시킨다. Warner, Sony 등 국제적인 음반 기획사들은 ATV, TVB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스타 발굴에 나섰는데, 이들이 80년대 칸토 팝 대흥행의 주역이다. 70년대에 활약한 위너스의 멤버인 알란 탐(Alan Tam, 譚詠麟), 오디션을 통해 등장한 레슬리 청(Leslie Cheung, 張國榮, 장국영)과 애니타 무이(Anita Mui, 梅艶芳, 매염방) 등 1세대 아이돌 스타가 이 시대 음악을 이끌었다. 이들은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그 앞 세대 스타들처럼 영화와 방송까지 오가며 활동하는 ‘멀티테이너’ 형 스타였다. 이는 칸토 팝이 아시아 주변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화교 문화권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등에도 영화로 얼굴을 알린 후 음악으로 해당 국가의 대중들도 사로잡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아시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던 시기였다.
가요 시장의 성장과 함께 가요 시상식도 등장한다. 1978년 “십대중문금곡”, 1983년 “십대경가금곡”, 1989년 “질타” 등이 등장했는데, 이들 시상식은 음반 판매량을 높이고 싶었던 음반사의 생각과 어우러져, 막 형성되었던 칸토 팝 팬덤이 극단적인 경쟁을 일으키도록 조장했다. 팬덤 간 경쟁은 폭력 사건 등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졌다. 경쟁이 격화되자 알란 탐은 가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포했고 레슬리 청도 가요계에서 은퇴했다. 남자 가수들 팬덤의 갈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가요 여제(歌后)”를 둘러싼 경쟁도 치열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샐리 입(Sally Yip, 葉蒨文, 섭천문/엽천문으로 읽기도 함)과 샌디 람(Sandy Lam, 林憶蓮, 임억련), 프리실라 찬(Priscilla Chan, 陳慧嫻, 진혜한) 등은 다양한 장르와 콘셉을 시도하며 애니타 무이의 아성에 도전했다.
알란 탐과 레슬리 청의 은퇴는 다른 이들의 기회가 되었다. 4대 천왕이라 불리는 네 명의 남자 가수가 그들이다. 80년대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아온 재키 청(Jacky Cheung, 張學友, 장학우), 영화 “천장지구(홍콩 원제 : 天若有情)”으로 크게 떠오른 앤디 라우(Andy Lau, 劉德華, 유덕화), 그리고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 애론 쿽(Aaron Kwok, 郭富城, 곽부성)과 레온 라이(Leon Lai, 黎明, 여명)가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중화권 문화시장도 통합되기 시작했는데, 90년대에는 홍콩과 대만 사이에서 특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홍콩은 중국으로 오가는 창구였으며 대만은 중국과 같은 국어가 사용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가수 가운데는 페이 웡(Faye Wong, 王菲/王靖雯, 왕비/왕정문)이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4대 천왕과 페이 웡은 지난 세대의 활동 방식을 이어가며, 아시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활동 범위를 중국으로 점차 넓혀갔다.
2000년대에는 많은 경제, 사회적 요인이 홍콩 가요계를 위축시켰다. 스타들은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으로 빠르게 떠났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열린 마당이 되었다. 칸토 팝은 새로운 스타들과 함께 홍콩의 특성이 두드러진 발라드에 집중했다. 이에는 가사의 문학성을 극한으로 추구했던 람젝(林夕, 임석), 웡와이만(黃偉文, 황위문) 등 작사가의 독보적인 활약도 있었다. 80년대에 데뷔했으나 대스타들이 사라진 후에야 주목받은 하켄 리(Hacken Lee, 李克勤, 이극근), 중화권 전역의 발라드 스타로 떠올랐던 이슨 찬(Eason Chan, 陳奕迅, 진혁신)과 홍콩의 발라드 여제 조이 융(Joey Yung, 容祖兒, 용조아) 등이 이 시대를 이끌었던 가수들이다. 뛰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제이슨 찬(Jason Chan, 陳栢宇, 진백우), 힌스 청(Hins Cheung, 張敬軒, 장경헌), 케이 제(Kay Tse, 謝安琪, 사안기) 등이 그 뒤를 이었으나 발라드 음악만의 지속에 대중은 점차 지루함을 느꼈다. 대중은 K 팝과 중화권 타지역의 음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10년대 홍콩에는 전 시대의 레슬리 청이나 앤디 라우 만큼 사람들을 열광시킨 가수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스타도 없었다. 지난 10년의 가수들이 여전히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새로운 발라드 가수들의 인기는 도토리 키재기와 같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음악에서 새로운 시도를 전개했다. 이바나 웡(Ivana Wong, 王菀之, 왕완지)과 파코 차우(Pakho Chau, 周伯豪, 주백호) 등이 자신의 색이 돋보이는 곡들을 들고나오며 칸토 팝에서 발라드 외의 장르가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 영향으로 밴드, 보컬 그룹 등 주목받지 못하던 음악 형태도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거리로 나섰던 홍콩인들은 2014년 이후 홍콩 문화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음악계의 새로운 시도에 호응한다. 이들의 음악은 칸토 팝 발라드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변화라는 점에서 K 팝 스타일이라는 큰 변화의 등장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