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부터 홍콩 음악의 교류 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번안이 크게 줄어들은 것이다. 일본에선 잃어버린 시대가 시작되며 가요계가 쇠퇴하였으며 세계화로 인해 미국 문화는 직수입되었다. 반대로 대만과는 음악 시장이 점차 통합되었다. 가수들은 대만과 홍콩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홍콩 가수들에게는, 전 세계 중국어권의 표준어인 국어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것이 대만 활동의 이점이었으며, 대만 가수들에게는, 홍콩이 당대 중화권 대중문화 생산의 중심이었으며 중국과의 소통창구였다는 점이 홍콩 활동의 이점이었다. 이에 80년대 말부터 국어 음반을 발표한 레슬리 청과 알란 탐을 시작으로 여러 홍콩 가수들이 대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재키 청(장학우)의 ‘이별 키스(吻別)’(1993)와 앤디 라우(유덕화)의 ‘사랑을 잊게 하는 물(忘情水)’(1995)은 특히 큰 인기를 끌어 대만의 국민가요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我的少女時代, 2016)"에서 여주인공이 홍콩 스타 앤디 라우의 음악을 들으며 과거로 들어가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만에서 이미 큰 인기를 끌었던 왕제(Dave Wang, 王傑, 왕걸)를 시작으로 저우화젠(Emil Chau, 周華健, 주화건)과 우치셴(Eric Moo, 巫啓賢, 무계현) 등이 90년대에 홍콩으로 진출한다. 왕제는 특히 홍콩 가단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기교 없이 소리를 내지르는 그의 창법은 칸토 팝에선 전례가 없었기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같은 곡을 홍콩에서는 광둥어로, 대만에서는 국어로 발표하는 일이 활발했다. 가수들은 같은 곡을 두 언어로 불러 두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양안을 오가면서 활동하지 않는 가수들의 경우, 같은 곡의 광둥어 버전과 국어 버전을 나누어 쓰기도 했다. 케니 비(Kenny Bee, 鐘鎭濤, 종진도)와 장위성(張雨生, 장우생)의 ‘큰 바다(大海)’(1992) 등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일본 곡 번안도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이미 나온 대만 곡을 완전히 번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래 표는 1993년 “십대경가금곡”에 선발된, 그해에 가장 사랑받았던 10곡이다. 이 10곡과 관련된 곡들을 통해 다양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홍콩 발라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2000년대에는 내용에서 외부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홍콩 반환과 아시아 사회의 성장은 홍콩인이 영미권보다 아시아를 더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때마침 한류 드라마와 일본 로맨스 영화가 아시아를 강타했다. 이 영향으로 홍콩인들은 이미 익숙하던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을 여행지로 찾기 시작한다. 홍콩인의 감성 속에 일본과 한국 여행, 드라마 속의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사랑, “눈과 산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로 요약될 수 있는 두 나라의 풍경은 홍콩 가요 속에 녹아든다. 대표적인 예로 하켄 리(이극근)의 ‘흩날리는 꽃(飛花)’(2001)이 삿포로의 눈꽃을, ‘서울의 어쩔 수 없던 사랑(情非首爾)’(2005)이 명동, 남산 타워 등 서울의 관광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더라도, 일본의 영향으로 벚꽃과 눈이 가사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사랑에서 단순한 달콤함이나 권태보다는 아픔과 지독함이 강조되었다.
'서울의 어쩔 수 없던 사랑'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다시 명동과 신촌을 거닐어도 될까?"라는 내용의 가사가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정서가 빠르게 홍콩에 침투한 것과 반대로, 음악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미 쳉(Sammi Cheng, 鄭秀文, 정수문) 등이 2000년 전후의 테크노 음악을 일부 번안했던 것(이정현의 ‘바꿔’(2000)가 사미 쳉의 ‘사건 종료(煞科)’(2000)로 번안됨)을 제외하면 한국 음악과의 교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홍콩 음악인들은 발라드 황금기에 취하여 이를 아예 다른 층위의 음악으로 치부하고 교류하지 않았다. 끝내 댄스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현상은 2010년대 이후 홍콩 음악이 획일화되고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뒤늦게 일부 기획사에서 부랴부랴 한국 아이돌을 모방한 아이돌 그룹을 등장시키기도 하였으나 기량, 곡, 특히 안무에서 큰 실력 차이를 보였다. 심지어 중국의 모방 그룹들에도 미치지 못했다.
2018년 “전민조성”이 방영되며 칸토 팝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프로듀스 101”의 포맷을 활용한 프로그램으로, 이미 기량을 보이는 이를 뽑아 가수로 데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 스타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홍콩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의 아이돌, 즉 한국 아이돌에 뒤지지 않는 아이돌을 만드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전민조성”의 프로듀서들은 아이돌 그룹 MIRROR를 통해 그것을 해냈고, 이는 칸토 팝 전반에 대한 홍콩 대중의 관심을 다시 끌어올린다.
이를 통해 보면, 칸토 팝은 끊임없이 해외 음악과 교류하며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해외에 의지하지 않고도 음악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게 된 90년대 이후에도 대만, 한국, 일본 등이 자극제로 작동했다. 그렇기에 칸토 팝이 스스로 일궈 온 역사가 홍콩 음악의 씨줄이라면, 새로운 무늬를 짜가며 한 폭의 천을 완성할 수 있게 해주는 날줄은 해외 음악의 자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