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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원 Mar 23. 2022

칸토 팝의 개방성 (1) 80년대와 일본

1부, 홍콩 대중음악의 배경 (2-1)

 홍콩 문화의 큰 특징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데 아주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영국의 짙은 색채는 도시 경관과 생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거리의 음식점에서는 일본, 인도, 한국, 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온 주방장들이 요리한다. 2022년 현재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한국 댄스가 유행이지만, 그전에는 영미권 팝 스타들과 일본 아이돌도 큰 사랑을 받았으며 모든 세대가 일본 애니메이션과 함께 자라났다. 이곳이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알려주는 표지는 한자로 적힌 이데올로기의 표어들 정도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해외 문화의 적극적 수입과 변용은 칸토 팝 음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홍콩이 해외 문화, 특히 음악을 빠르게 흡수했던 것은 홍콩이 문화예술의 중심이거나 기반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근대 시기에 중화권의 예술은 주로 각 왕조의 수도에서 발전하였으며 지역 상업 중심지에서 각 지역 음악이 형성되었다. 광둥 지역의 중심은 늘 광저우였으며 광둥어 음악극인 월극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홍콩은 영국이 차지하기 전까지 작은 섬이었을 뿐이었다. 홍콩 성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청 왕조 말부터 중화민국 시기까지 음악의 중심은 상하이였다. 이 시기에 홍콩은 상하이에서 소비되는 음악이나 월극이 공연되는 공연장이 있었을 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큰 차이는 없었다. 홍콩은 화교들을 위한 문화의 주문생산 기지였지 특색을 가지지도, 중심으로 올라서지도 못했다. 대부분의 가수는 과거 상하이나 대만에서 유행하는 가수에 빗대어 “작은 ~(小~)”으로 불렸고 음식점이나 주점의 무대에 섰다.     

'에펠탑 구름 위에서'를 부르는 샘 후이

 그렇기에 칸토 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는 영어로 된 미국과 영국의 팝 음악과 중국어로 된 대만의 음악을 수용하며 자기탐색에 나서는 시간이 있었다. 이 시기의 대중 가요 문화는 다른 문화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의 전통을 성립하는 과정이었다. 알란 탐, 조지 람(George Lam, 林子祥, 임자상) 등은 팝송을 리메이크하거나 당대 유행하던 로큰롤 음악을 따라한 곡을 발표했으며 덩리쥔(Teresa Teng, 鄧麗君, 등려군), 쑤루이(蘇芮, 소예), 차이친(蔡琴, 채금) 등 대만 가수들이 언어의 제약 없이 홍콩에서 활동했다. 마카오 출신으로 대만에서 데뷔한 가수 제니(Jenny Tseng, 甄妮, 견니)도 본격적으로 광동어 가요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국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70년대 들어 점차 홍콩인, 홍콩 문화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광둥어가 대중음악의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하며 이들의 유산이 칸토 팝의 전통을 만들어낸다. 샘 후이(허관걸)가 미국의 컨트리 장르를, 마이클 콴(Michael Kwan, 關正傑, 관정걸)이 상하이 풍 음악과 일본 엔카 장르를 바탕으로 한 노래들을 대거 발표한다. 이들은 단순히 언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홍콩 시민들의 정서를 곡에 담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 세계 여러 곳을 언급하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나그네 같은 홍콩 사람들의 삶을 노래한 샘 후이의 ‘에펠탑 구름 위에서(鐵塔凌雲)’(1972)가 있었다. 점차 칸토 팝은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정서를 갖춘 하나의 독립된 음악 장으로 존재하게 된다.     


 영어권과 대만이 주 관심사였던 홍콩 음악 시장은 80년대에 본격적으로 일본 가수들로 관심이 옮겨가며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이미지 변화를 수반한다. 홍콩의 전통적인 미남은 눈매가 짙고 부리부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소년 아이돌들이 유행한 것처럼 귀공자, 미소년 이미지로 점차 대체된다. 1982년 영화 “열화청춘(烈火靑春)”에서 레슬리 청(장국영)이 선보인 이미지 변화를 시작으로 대니 찬(Danny Chan, 陳百强, 진백강), 재키 청(장학우) 등이 그 뒤를 이었다. 70년대부터 활동한 알란 탐과 조지 람이 긴 머리를 단정한 커트 머리로 바꾼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특히 레슬리 청은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였다. 그는 단순히 이미지 변신에 그치지 않고 일본 댄스 곡 번안곡으로 활동하며 음악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84년 키카와 코지의 곡을 번안하여 발표한 MONICA는 칸토 팝의 혁명이라 부를 만한 곡이었다) 여가수들도 일본에서 마츠다 세이코, 꽃의 82년조 등의 여자 아이돌이 흥행함에 따라 우아한 이미지에서 청순하거나 파격적인 이미지로 변화를 시도한다.      

레슬리 청, 1979년과 1984년. 당시 영국과 미국 팝 스타 스타일의 장발에서 일본 스타일의 댄디한 외모로 바뀌었다.

 한편, 70년대 말에 광둥어로 노래를 부르는 문화가 확립되고, 일본 문화가 유행하게 되자 번안곡이 쏟아져 나온다. 국어나 영어와 달리 일본어는 홍콩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였기에 곡을 그대로 부르는 대신 광둥어로 가사를 번안하게 되었다. 타니무라 신지부터 야마구치 모모에, 나카모리 아키나, 안전지대 등 다양한 경향의 음악이 번안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에 한국 곡을 번안하기도 했다. 한국은 경제적인 부상과 88`올림픽으로 홍콩 시민들의 관심이 커진 곳이었으며 재일교포 등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한국 곡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곡 가운데는 조용필의 ‘친구여’(1983)가 알란 탐의 ‘사랑은 깊은 가을에(愛在深秋)’(1984)로, 구창모의 ‘희나리’(1985)가 로만(Roman, 羅文, 나문)의 ‘얼마나 비바람을 맞았나(幾許風雨)’(1986)로,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1987)이 제니의 ‘태양 같은 친구여(友誼太陽)’(1989)로 번안된 것이 대표적인 한국 곡 번안곡이다. 프리실라 찬(진혜한)이 앤지 골드의 ‘Eat You Up’(1985)을 ‘춤추는 거리(跳舞街)’(1986)로 번안하며 원곡의 선율보다는 일본에서 번안해 오기노메 요코가 부른 ‘댄싱 히어로(ダンシング・ヒーロー)’(1985)의 빠른 선율을 사용한 것도 흥미로운 사례이다.      


 홍콩의 번안은 일본에서 히트한 거의 모든 곡을 번안할 정도였다. 홍콩의 연말 대중음악 시상식인 십대경가금곡(十大勁歌金曲)에서 매년 10대 명곡 중 2에서 3곡은 일본 번안곡이 차지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인기곡이 나오면 다른 가수가 먼저 번안한 것과 상관없이 번안하기도 하였다. 1989년, 당대 일본의 최고 남자 아이돌인 곤도 마사히코의 유행곡 ‘석양의 노래(夕焼けの歌)’를 애니타 무이(매염방)와 프리실라 찬이 각각 번안하여 ‘석양의 노래(夕陽之歌)’와 ‘수천 곡의 노래(千千闕歌)’로 각각 발표하였는데, 두 곡이 모두 십대경가금곡에 뽑히기도 하였다. 당시 번안된 곡의 수를 모두 확인하긴 어렵기에, 번안 정점을 찍었던 1984년, 레슬리 청과 알란 탐이 발표한 정규앨범, "LESLIE"와 "사랑의 근원(愛的根源)" 수록곡을 살펴보며 그 정도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한 눈에 아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곡의 번안은 칸토 팝의 독자적 발전을 저지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독자적 작곡, 편곡 시스템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음악인들은 단순히 곡을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편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칸토 팝 스타들의 일본 진출을 돕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협조는 칸토 팝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홍콩 작곡가들은 번안곡을 참조하여 비슷한 풍격의 곡을 지어 앨범에 넣기도 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창작 연습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90년대부터는 칸토 팝이 세계적 흐름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번안은 홍콩 작사 문화에도 발전의 계기를 주었다. 같은 곡을 번안했을 때, 더 주목받기 위해 문아하고, 곡과 잘 어울리는 가사를 지어야 했다. 게다가 홍콩에는 중국 고전 문인들의 전통이 남아있어 곡의 음계와 각 글자가 가진 성조적 특징을 일치시키는 음성적 조화와 각 줄의 끝 글자를 같은 운으로 하는 각운법 또한 요구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외국 곡에 성조를 맞추는 것은 작사가들에게 고민의 시간을 안겨주었다. 또 일본 곡의 가사가 홍콩 대중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경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야 했다. 재키 청의 ‘머나먼 그녀(遙遠的她)’(1985)를 그 예시로 살펴보자. 이 곡은 타니무라 신지의 ‘낭만철도(浪漫鉄道)’(1985)라는 곡을 번안한 곡인데, 곡은 아름다웠지만 기차여행을 소재로 하는 가사는 홍콩에 어울리지 않았다. 철도로 이어진 대륙으로 거의 통행하지 않았던 홍콩 시민들에게 철도여행이라는 주제는 생소했다. 그렇기에 작사가 판윈렁(潘源良, 반원량)은 세상을 먼저 떠난 소녀에 대한 마음을 안타깝게 털어놓는 내용으로 새로운 가사를 붙인다. 각운도 모두 –a 운에 해당하는 글자들(霞, 她, 掛, 話, 怕, 差, 假, 化, 炸, 家)로 맞추어졌다. 이러한 고민 속에 작사가들의 표현 능력은 극대화되었는데, 2000년대 발라드 전성기에 등장한 예술적 가사들은 1980년대 번안곡 작사와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머나먼 그녀'가 수록된 재키 청의 앨범 "AMOUR"(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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